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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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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이 우리를 살립니다”
2009-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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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침체 때문에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명의 발견, 또는 사명에 대한 확신이 침체의 늪에서 우리를 구출해 줍니다. 엘리야가 침체의 늪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질문이 무엇입니까?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열왕기상 19:9)” 왜 이곳에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은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이 침체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명이 발견되지 않으면 ‘침체의 장기화’가 일어납니다. 인생의 목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세 번 태어나야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제1의 탄생은 육체적 탄생이요, 제2의 탄생은 영적인 탄생이요, 제3의 탄생은 사명적 자아의 탄생입니다. 카를 힐티 라는 저술가는 그의 저서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에서 행복의 원천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값을 발견하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그의 나이 22세 때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써놓았습니다. “온 세계가 무너진다 해도 내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이념, 내가 그것을 위해서 살고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명을 나는 찾아야 한다”
사명을 잃어버린 아담과 하와는 낙심으로 숨었습니다. 사명을 잃어버린 가룟유다는 ‘침체’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비슷한 잘못을 범한 베드로는 ‘사명의 재발견’으로 반석의 삶을 이룹니다. 아브라함은 사명을 발견하자 75세에 가나안 이주를 시도합니다. 모세는 사명과 더불어 80에 새로운 인생의 황금기를 만듭니다. 할 일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다 할 때까지 죽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할 일을 놓지 않고 있으면 삽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았던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날마다 주어진 한 컵의 물 중 적은 분량을 남겨 날마다 면도를 한 사람은 살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그 지옥 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할 일이 있는 사람은 살아났고 할 일을 잃은 사람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독일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1337년 뮌헨에서 뒤츠 슈벤블라라는 이름의 사나이가 반란죄로 잡혔습니다. 그리고 네명의 부하와 함께 사형을 선고 받고 참수형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슈벤블라는 자기의 부하들을 위해서 이렇게 애원을 했습니다. "제 목이 절단되는 순간에 제가 떨어진 머리를 들고 부하들이 있는 앞에까지 달려가 볼 테니 제발 저 불쌍한 부하들을 살려 주십시오." 재판관은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하며 코웃음을 쳤지만 그의 애원이 하도 간절했던지라 짐짓 그렇게 약속했습니다. 이윽고 사형 집행관의 칼이 슈벤블라의 목을 쳐내린 순간, 그는 두 손으로 자기의 머리를 쳐들고 부하들이 떨고 있는 앞까지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갔습니다. 결국 그의 부하 네명은 죽지 않고 살게 되었습니다. 뒤츠 슈벤블라의 행동은 훗날 ‘사명의 경주’라고 일컬어 지게 되었습니다. 때로 사명을 따라가는 삶은 상식을 뛰어넘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사명은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명 때문에 우리는 침체를 뛰어넘는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새는 날개가 무거워도 그것으로 인해 날 수 있고, 배는 돛이 무거워도 그것으로 항해하고, 기차는 엔진이 무거워도 그것으로 질주하고, 비행기는 날개가 무거워도 그것으로 날아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명은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부담스러운 사명이 우리를 비상하도록 만듭니다. 어떤 사람이 시계에 달린 큰 추를 보고는 시계가 힘들어 하니 추를 떼어 두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추를 떼는 그 순간에 시계바늘은 멈추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성도들은 피곤하고 힘들어도 사명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명이 우리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환경과 조건에 구애 받지 않고 늘 역동적인 삶을 이룰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사명’ 때문입니다. 사명을 생각하며 삽시다. 사명완수에 대한 의지 없이는 언제든지 침체의 늪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부정적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만, 신앙인도 깨어지기 쉬운 연약성이 있는지라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활력있는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명자는 예배를 사랑합니다. 사명자는 교회를 받들기를 기뻐합니다. 사명자는 성도의 교제를 즐거워 합니다. 사명자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가치있는 일로 여깁니다. 사명자는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사명과 더불어 활력있는 인생으로 세워지길 소망하며
목회실에서 김지성목사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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