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월드비전, 그리고 원맨비전” 2014년 10월 현재 세계인구는
72억6천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역사가 생긴 이래 지구에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보니 한사람의 소중함이 그렇게 피부에
와닿지 않는 것이 현실이 되어 버린 느낌입니다. 사람과의 인연, 사람에 대한 의리, 사람에 대한 가치도
많이 퇴색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미국에 이민왔을 때 집 가까운 곳에 한인가족이 이사를 오면 너무 반가웠습니다. 한인타운이 형성되어 있었지만 한인타운에서 만나는 한인들조차
반갑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흔한 한인들을 접하다보니 같은 핏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별 감흥이 없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군중 속에 자리잡은 ‘한사람’은 과연 별볼일 없는 존재일까요? 사람들은 ‘월드비전’에 열광합니다. 꿈을 넓게 그리고 높게 세우고 세계를 품습니다. 참 좋습니다. 꿈은 클수록 멋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계를 가슴에 품는 ‘월드비전’은 지나칠 수 있는 한사람에게 소망을 두는 ‘원맨비전’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세계의 복음화를 외치는 사람이 한사람을 지나쳐버린다면 세계의
복음화는 이미 물건너가 버린 것과 다름없습니다. 예수님은 ‘땅끝’을 주목하셨습니다. 동시에 제자들에게 땅끝을 바라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마음에 품으신 예수님의 일상사를 살펴보면 ‘한사람’에 촛점을 맞추셨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수가성의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 유대인의 사마리아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수많은 군중
속에서 늘 고독했던 한사람 삭개오를 주목하셨습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차 사라져 버리기 시작한 나사로의 주검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처절한 고통의 현장이었던 십자가 위에서 조차 처형받아 마땅했던
죄인 중의 죄인된 한 강도를 주목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월드비전’은 결국 ‘원맨비전’이 되어야 함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역사를 통해서도 한사람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됩니다.
최근 살펴본 한사람이 행사한 투표권의 영향력입니다. 1645년, 한
표는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에게 영국의 지배권을 주었습니다. 역사는 한사람 쯤이야…로 가볍게 여길 수
있었던 한사람의 몫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예를재조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한사람의 중요성을 새삼 재인식살 수 밖에 없습니다. 앤 랜더스라는 사람은 “한 사람의 투표는 역사에 있어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인가를 주목해야함은 당연하지 않겠는가?”라고
역설했습니다. 세계비전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세계를 품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한사람을 마음에 품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사람이 세계비전을 언급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입니다. 당신은 그 한사람을 마음에 품는 원맨비전을 소유한 사람인지요?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1649년, 한 표는 영국의 찰스 1세를 처형시켰습니다.
1776년, 한 표는 미국에서 독일어 대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1845년, 한 표는 텍사스를 연방정부에 가담하게 만들었습니다.
1868년, 한 표는 앤드류 존슨(Andrew Johnson) 대통령을 탄핵으로부터 구했습니다.
1875년, 한 표는 프랑스를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꾸었습니다.
1876년, 한 표는 러더포드 B 헤이즈에게
제19대 미국 대통령이라는 영예를 주었습니다.
1923년, 한 표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나치당의 리더십을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