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어떻게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인가?"
옛 중국의 어떤 황제는 침실 벽에 걸어놓은 폭포가 흘러 내리는 그림을 보고 “저
그림의 폭포수 때문에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으니 당장 치워버리라”고 소리쳤다 합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감성이 보통이 아닙니다. 그림 속의 폭포수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오감을 초월하는 감성이 그에게는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보이는 것을 뛰어넘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습니다. 시적 감각을 가진 사람은 새소리를 ‘새의 노래’로 듣습니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바람의 흐름을 따스한 어머니의 손길로 느끼기도 합니다. 뛰어난 사진작가는 0.1초도 안되는 최소한의 순간에 정지된 아름다움을 잡아냅니다.
뛰어난 작가이며 교육가였으나 시각과 청각의 중복 장애인으로 살았던 헬렌 켈러의 시 중에 다음의 글귀가 있습니다.
<행복의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닫혀진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 단지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다>
헬렌 켈러는 볼 수도 없었고 들을 수도 없었고 말도 할 줄 몰랐지만 그는 내면의 영혼을 통해서 세상의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헬렌 켈러는 오감을 뛰어넘는 영감의 소유자였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행복은 꼭 오감이 충족될 때만 경험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감을 뛰어넘는 감성이 있을 때에도 경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감(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으로는 고통과 통증이 느껴지지만, 오감을 뛰어넘는 영감으로는 고통 속의 평강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우리는 신앙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표현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표현하는 행복은 오감을 만족시키는 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오감을 뛰어넘는 영감으로 경험되는 초월적 느낌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표현하는 ‘행복’은 그래서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 행복을 이해하려면 ‘경험’해 보는 것이 최선입니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과 동행하기로 결심하는 순간 오감을 뛰어넘는 영감과 감성이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아직까지 예수님을 잘 모르신다면 예수님을 영접해 보십시오. ‘행복’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행복의 자리로 여러분을 초대하며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