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옥시모란 (Oxymoron)”
앞뒤가 안맞는 말이 결합하여 어떤 수사적인 효과를 노리는 문장법을 ‘옥시모란(Oxymoron)’ 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점보슈림프와 같은 말입니다. 점보는
엄청나게 크다는 말이며, 슈림프(새우)는 작은 생명체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두개의 모순되며 상이한 단어가 결합하여 점보슈림프라는 어휘가 생겼습니다. ‘불편한 진실’ ‘달콤한 슬픔’
‘신선한 충격’ ‘홍수
속의 갈증’ ‘풍요속의 빈곤’ ‘사(死)의 찬미’등 문학에서 이런 어휘나 표현들이 대표적 ‘옥시모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옥시모란’을
많이 사용하신 분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마 5:4)’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 ‘섬기는 자(작은 자)가 큰 자다 (마 23:11)’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는다 (마 10:39)’ 등등… 바울 사도 또한 ‘옥시모란’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약한데서 강하여 진다 (고후 12:10)’ ‘괴로움을 기뻐한다(골 1:24)’
‘죽는 것도 유익이다(빌 1;21)’… 사도
베드로는 ‘기쁨의 고난(벧전 4:13)’이라는 ‘옥시모란’을
사용했습니다.
신앙은 결국 ‘옥시모란적 삶’인 것 같습니다.
신앙은 일상적인 것을 거부하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일상적인 삶은 ‘좋은 게 좋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옥시모란’이 없습니다. 그런데 ‘힘든게 좋은 것’이라면 ‘옥시모란’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옥시모란’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평범을 거부합니다. 평범하거나 일반적이라면 신앙적 태도가
아닐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홍해바다의 갈라짐은 ‘약함의 강함’이라는 ‘옥시모란’이, 여리고성의 무너짐에는 ‘우레같은 침묵’이라는 ‘옥시모란’이 있었습니다.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5개로 남자만 5천명이 배부르게 먹고 열두광주리에 수북히 남긴 대역사는
‘아주 작은 헌신’이라는 ‘옥시모란’이, 인류구원의 대역사는 ‘십자가
위의 사랑’이라는 ‘옥시모란’이 있었습니다.
신앙적 모습인지, 아닌지를 점검해 보는 것은 그렇기에 의외로
쉬울 수 있습니다. 평범한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면 아마도 신앙에서 조금은 이탈된 모습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평범을 뛰어넘어 ‘옥시모란’을 형성하는 삶으로 가고 있다면 그것은 신앙의 모습이 분명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옥시모란적 삶’을 ‘좁은 길’로 표현하셨으니까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돕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태복음 7:13, 14)”
오늘은 수많은 무리들을 보시면서 ‘추수할 일꾼이 없다’라고 한탄하시는 예수님의 ‘옥시모란’이
더욱 가슴에 와닿습니다.
사랑과
감사로
목회시에서
김지성목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