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해석”
‘안중근’ 그는 모름지기 한국인들에게는 역사적 영웅으로 평가 받습니다. 한민족들에게는 침략의 원흉이라고 여겨졌던 초대 한국통감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저격하여 일본 침략의 만행을 세계에 알렸기 때문입니다. 안중근의 저격사건은 한국민에게는 의로운 행위라는 의미에서 ‘의거’라고 불리며, 그의 이름 석자 뒤에는 ‘정의롭고 존경하기에 합당한 인물’이라는 뜻인 ‘의사’라는 호칭이 따라붙습니다. 반면 일본에서 ‘안중근’은 일개 테러리스트나 암살범인 ‘범죄자’로 취급합니다. 우리 한민족에게는 침략의 원흉으로 알려진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일본에서는 일본 역사 이래 최고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일본의 근대화의 초석을 놓았고, 일본의 부국강병을 이룬 일등공신으로 평가받기 때문입니다.이 동일시대의 두 인물은 한국과 일본에서 하늘과 땅 만큼이라 완전히 다른 평가를 받습니다.
동시대 동일 인물임에도 한쪽에서는 민족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원흉이나 범죄자로 손가락질 받는다는 사실이 정말 흥미롭습니다. 두 인물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평가가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요? 이 두 인물에 대한 한일 양국간의 상이한 평가는 ‘해석’에 대한 중요성과 위험요소를 동시에 상기시켜 줍니다.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해석입니다. 사실을 인정한다 해도 그 사실에 어떠한 정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서 사실은 긍정이 될 수도 있고, 또 부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민수기서에는 그 유명한 열두명의 정탐꾼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똑같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곳에 살고 있는 가나안 사람을 보고 온 돌아온 후 두개의 상이한 보고서가 제출됩니다. 첫번째 보고는 가나안 땅은 ‘그림 속의 사과’ 처럼 꿈도 꾸지 말아야 할 땅이며, 상대해야 할 가나안 사람들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강력한 존재라는 결론입니다. 반면, 두번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그 땅은 쉽게 정복될 수 있으며 가나안 사람들은 먹이에 불과한 존재다라는 보고입니다. 분명 가나안 땅을 보았지만 결론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상이합니다. 무엇이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해석’입니다.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 모두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해석에 따라 사실에 대한 정의는 얼마든지 다르게 내려질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교만하기 짝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무척이나 존경스럽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똑 같은 교회의 분위기에 대해서 ‘참 영적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척이나 인간적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프로그램에 대해서 ‘가치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쓰레기 같다’라고 평가절하 하기도 합니다. 개념에 대해서도 같은 현상이 만들어집니다. ‘영적’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개념은 하나이나 해석은 천차만별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은 성경에 분명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해석은 제각각 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워진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적어도 신앙인이라면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섬기는 방식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 다릅니다. 심지어는 그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고 “맞다” “틀리다”라고 맞서며 싸우기도 합니다. 성경구절을 접하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분명 동의합니다. 그러나 정작 해석을 놓고는 으르렁거리기도 합니다. 주일성수가 성경적임을 신앙인은 결코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일성수 방법에 대해서 만큼은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합니다.
사실 그 자체가 문제된 적은 별로 없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언제나 ‘해석’이 됩니다. 그래서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해석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바른 해석이 필요합니다. 바른 해석을 위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입니다. 교만이냐 겸손이냐는 누구를 의지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면 ‘겸손’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의지한다면 교만이 됩니다. 겸손의 자세로 사실 속에 담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해석의 과정에서 참된 사실의 의미는 발견됩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