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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 “나의 꿈을 사주실 분을 기다립니다” (2014년 1월 12일) 파일
GMC
3272 2014-01-10
Normal 0 false false false EN-US KO X-NONE <style> /* Style Definitions */ table.MsoNormalTable {mso-style-name:"Table Normal"; mso-tstyle-rowband-size:0; mso-tstyle-colband-size:0; mso-style-noshow:yes; mso-style-priority:99; mso-style-parent:""; mso-padding-alt:0cm 5.4pt 0cm 5.4pt; mso-para-margin-top:0cm; mso-para-margin-right:0cm; mso-para-margin-bottom:10.0pt; mso-para-margin-left:0cm; line-height:115%; mso-pagination:widow-orphan; font-size:11.0pt; font-family:"Calibri","sans-serif"; mso-ascii-font-family:Calibri; mso-ascii-theme-font:minor-latin; mso-hansi-font-family:Calibri; mso-hansi-theme-font:minor-latin;} </style> “나의 꿈을 사주실 분을 기다립니다” 아리조나 인디언 보호구역을 갈 때마다 보는 것이 있습니다. 가죽으로 싼 둥근 고리입니다. 그것은 둘레를 따라 나일론 실로 엮어놓아 마치 거미줄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리 끝에는 새 깃털이 매달려 있습니다. 인디언들은 그것을 ‘드림캐처(Dream Catcher)’라고 부릅니다. 우리 말로 한다면 꿈을 잡는 도구라는 말입니다. 인디언들은 꿈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좋은 꿈을 낚아채려고 여기저기에다 이 ‘드림캐처’를 걸어놓습니다. 인디언들의 ‘드림캐처’를 보면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꿈의 가치는 인정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꿈은 신비한 것입니다. 위대한 일을 이룬 사람들은 한결같이 위대함의 성취가 ‘꿈을 꾸는 일’로부터 시작했음을 말합니다. 성경은 ‘꿈’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만 한정 지어서 베푸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용함을 받은 영적거인들은 모두가 ‘꿈의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위대한 성취를 거둔 삶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성취는 ‘꿈’이라는 스타트라인에서 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뉴스위크 잡지에서 눈에 뛰는 광고를 보았습니다. 한 농부가 불만에 찬 모습으로 조그만 호박을 들고 있는 사진과 함께 “수확하는 열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뿌린 씨앗을 점검해 보십시오”라는 카피의 광고였습니다. 기억하기로는 어떤 투자회사의 광고였던 것 같은데 투자자들에게 자신의 회사를 ‘비전기업’으로 인식시키기 위한 의도로 내놓은 광고였던 것 같습니다. 그 광고를 보면서 저는 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씨앗은 참 작은 것입니다. 씨앗 한 알속에는 미래의 열매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씨앗이 풍성한 열매를 수확하도록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하고 좋은 품종의 씨앗을 심을 때만 풍성한 열매들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꿈은 씨앗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만이 진짜 꿈입니다. 그리고 그 꿈을 간직하게 될 때 세상 사람들이 놀라게 되는 위대한 성취가 반드시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본 내용인데 엄청나게 좋은 꿈을 꾼 사람이 그 꿈을 무려 2천5백만원(미화 23000불)에 팔았다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아마 그 꿈은 돼지가 수백마리씩 떼지어 몰려오는 꿈이었을 것입니다. 그 꿈을 판 사람도 그렇지만. 그 꿈을 산 사람도 대단합니다. 헛된 미신임에도, 들으면 웃기는 소리임에도 그 꿈을 사고 파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꿈을 무시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태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에 대한 성취와 가능성을 꿈으로 대체하신 예가 참 많습니다. 이 내용을 접하고 제 경건의 일기에 기록해 놓았던 내용입니다. “위대한 주님 안에서 꾼 꿈이 있다. 주님이 주신 꿈이기에 반드시 이루어질 축복의 꿈이다. 교회의 위대성, 하나님 나라의 위대성을 드러낼 바로 그 꿈이다. 이 꿈을 팔자. 이 꿈을 사줄 사람을 찾자.” 경건의 일기에 기록된 저의 적용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꿈을 팔고 싶습니다. 이 한해 꿈과 함께 살고 싶은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449 “우리의 눈은 미래를 정조준해야 합니다” (2014년 1월 5일) 파일
GMC
3076 2014-01-03
Normal 0 false false false EN-US KO X-NONE <style> /* Style Definitions */ table.MsoNormalTable {mso-style-name:"Table Normal"; mso-tstyle-rowband-size:0; mso-tstyle-colband-size:0; mso-style-noshow:yes; mso-style-priority:99; mso-style-parent:""; mso-padding-alt:0cm 5.4pt 0cm 5.4pt; mso-para-margin-top:0cm; mso-para-margin-right:0cm; mso-para-margin-bottom:10.0pt; mso-para-margin-left:0cm; line-height:115%; mso-pagination:widow-orphan; font-size:11.0pt; font-family:"Calibri","sans-serif"; mso-ascii-font-family:Calibri; mso-ascii-theme-font:minor-latin; mso-hansi-font-family:Calibri; mso-hansi-theme-font:minor-latin;} </style> “우리의 눈은 미래를 정조준해야 합니다” 터키와 그리스는 찬란했던 헬라니즘 문화의 보물창고입니다. 국가 전체가 문화유적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느 곳이건 땅만 파면 문화재들이 다량으로 쏟아져 나온다고 합니다. 중소도시라해도 왠만한 도시에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박물관에는 눈이 휘둥그래질 수 있는 국보급 문화재들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두나라는 풍광이 아름답기도 해서겠지만, 곳곳에 산재한 유적지와 문화재 때문에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물밀듯 밀려오는 나라들로 유명합니다. 터키와 그리스는 과거가 같은 헬라문명권을 바탕으로 한 국가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과거에 대한 관점은 완전히 다른 듯 여겨집니다. 터키는 비록 찬란했던 과거를 역사로 가진 나라지만 과거에 그리 집착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과거보다 새로운 문명을 창출하겠다는 의지를 바탕으로 ‘미래창조’에 역점을 둔 정책을 펼쳐가는 듯합니다. 유적지를 발굴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보다 국가적 기간산업을 세워가는 일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빌딩을 짓고, 산업단지를 개발하며 미래를 향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반면 그리스는 ‘과거의 영광’으로 먹고 사는 나라처럼 느껴집니다. 문화적인 기량이 월등한 조상을 둔 탓에 큰 기간산업 없이도 관광산업 하나만으로도 선진국의 부를 누리는 나라가 그리스입니다. 그래서인지 국가의 경영, 국가의 모든 정책이 문화재 절대 우선주의로 실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는 국제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고층빌딩이 거의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국가적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도로를 새로 닦으려 해도 문화재 보호를 위해 건설기간이 다른 나라의 도로 건설에 비해 서너배는 더 천천히 진행된다고 합니다. 도심 교통 체증을 완화시키기 위해 건설을 시작한 짧은 구간의 지하철 공사가 이십년 넘게 진행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아연질색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문화를 아끼고 가꾸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난 과거의 유산도 미래가 확보될 때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십년 후쯤이면 터키와 그리스는 같은 헬라니즘 문화권이라는 과거는 계속 공유하겠지만, 그 미래의 모습은 확연히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선택할 수 없는 것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동시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소홀히 다루는 것 또한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과거는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래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아직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선택할 수 없는 과거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과거의 영광, 과거의 실수, 과거의 경험, 과거의 추억등등… 과거를 무시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과거는 현재를 결정하는 요인이 됩니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존재할 수 있는 차원에서 과거는 ‘진한 교훈’의 보고입니다. 그러나 미래는 과거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미래는 현재에 의해서만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과거가 영광스럽다해서 그 과거의 영광이 미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동시에 과거가 힘들었다해서 그 미래마저 고통스러울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History)를 전공으로 하는 학자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역사는 과거를 공부하는 것이지요?” 저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답변이 의외였습니다. “역사는 과거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과거 속에는 미래를 위한 진정한 교훈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지요. 미래와 관련없는 학문은 학문이 아닙니다.” 아주 인상적인 답변이었습니다. 과거에 집착하기 위해 과거를 공부한다면 공부할 가치가 없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말이었습니다. ‘과거는 훌륭한 교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는 전제가 담겨져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이사야 43:18, 19)”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신앙인의 눈은 미래에 정조준 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직 찾아오지 않은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창출할 찬란한 미래를 향해서 말입니다. 희망찬 한해를 시작하며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448 “흐르는 시간 앞에서” (2013년 12월 29일) 파일
GMC
3278 2013-12-27
Normal 0 false false false EN-US KO X-NONE <style> /* Style Definitions */ table.MsoNormalTable {mso-style-name:"Table Normal"; mso-tstyle-rowband-size:0; mso-tstyle-colband-size:0; mso-style-noshow:yes; mso-style-priority:99; mso-style-parent:""; mso-padding-alt:0cm 5.4pt 0cm 5.4pt; mso-para-margin-top:0cm; mso-para-margin-right:0cm; mso-para-margin-bottom:10.0pt; mso-para-margin-left:0cm; line-height:115%; mso-pagination:widow-orphan; font-size:11.0pt; font-family:"Calibri","sans-serif"; mso-ascii-font-family:Calibri; mso-ascii-theme-font:minor-latin; mso-hansi-font-family:Calibri; mso-hansi-theme-font:minor-latin;} </style> “흐르는 시간 앞에서” 박완서라는 분이 쓴 책 가운데 있는 내용입니다. “시간은 빨리 흐른다. 특히 행복한 시간은 아무도 붙잡을 새 없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참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어 주는 글귀입니다. 그러고 보니2013년이 시작된 지 어제 같은데 한해의 종착점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시간은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이란 시간과 뗄래야 뗄 수 없는 함수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인생을 의미있게 유지하려면 시간이라는 물리적 개념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시간은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시간의 양이 너무도 무한한 것 같지만 우리가 접하는 시간은 늘 새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접하고 있는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느끼는 것은… 시간은 빨리 비켜가고 싶은 순간에는 왜 그렇게 느릿느릿 가고, 1초라도 더 필요할 때는 왜 그렇게 쏜살같이 지나가는지… 시간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비협조적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의 양은 매우 공평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24시간이라는 똑같은 양의 시간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무언가를 성취하는 사람은 시간을 지혜롭게 관리합니다. 그들은 시간을 허비하거나 낭비하기보다는 시간을 제대로 사용합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사람들은 시간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돈은 재생 가능한 자원(Renewable Resource)입니다. 당장은 잃어버렸다 해도 그에 해당하는 노력을 기울이면 언제든지 다시 얻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항상 부족한 자원입니다. 시간은 사용되고 나면 그만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시간은 바로 우리의 인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시간관리(Time Management)"는 바로 "인생관리(Life Management)"를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됩니다. 매일 아침 우리들에게 8만6천400달러를 입금해주는 은행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하지만 아쉽게도 그 계좌는 당일이 지나면 잔액이 한푼도 남지 않습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그날 입금되어진 돈을 모두 인출해야 할 것입니다. 시간은 우리에게 마치 이런 은행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8만6천400초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습니다. 그러나 매일 밤 우리가 좋은 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한 시간들은 그냥 소멸되어 버릴 뿐입니다. 그래서 시간은 아주 소중하게 관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영부영하다가는 인생자체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부여된 시간들이 소멸되기 전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시간은 참 고약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결코 나를 여유롭게 기다려 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고약한 시간이 또 나를 떠나려 합니다. 다시는 아쉬움과 허전함으로 시간을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건만… 올해도 저는 아쉬움과 허전함으로 또 다시 시간과 작별을 고해야 하나 봅니다. 사랑과 감사로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447 “예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 (2013년 12월 22일) 파일
GMC
3349 2013-12-20
Normal 0 false false false EN-US KO X-NONE <style> /* Style Definitions */ table.MsoNormalTable {mso-style-name:"Table Normal"; mso-tstyle-rowband-size:0; mso-tstyle-colband-size:0; mso-style-noshow:yes; mso-style-priority:99; mso-style-parent:""; mso-padding-alt:0cm 5.4pt 0cm 5.4pt; mso-para-margin-top:0cm; mso-para-margin-right:0cm; mso-para-margin-bottom:10.0pt; mso-para-margin-left:0cm; line-height:115%; mso-pagination:widow-orphan; font-size:11.0pt; font-family:"Calibri","sans-serif"; mso-ascii-font-family:Calibri; mso-ascii-theme-font:minor-latin; mso-hansi-font-family:Calibri; mso-hansi-theme-font:minor-latin;} </style> “예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 매거진 ‘피플’지는 매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선정합니다. 2013년 올해 발표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미국 여배우인 기네스 펠트로입니다. 역대 피플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의 면모를 살펴보니 영화배우나 모델등 외모가 출충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선정의 기준은 ‘외모’인 것 같습니다. 기준이 모호하고 극히 주관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외모로만 평가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출중한 외모를 지녔음에도 그리 아름답지 못한 삶을 이룬 자들도 심히 많았다는 점을 간과한 선정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아름다움’은 느껴지는 것을 뛰어넘습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아름다움 속에는 ‘능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7년전 연말에 가족과 유타주의 자이언국립공원을 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몇바퀴돌고 긴 바위터널을 통과하여 맞닥드린 거대한 바위산은 아름다움의 결정체였습니다. 순간 입이 떡 벌어지며 아름답다는 표현보다 ‘두렵고 경이롭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절경을 만난 것입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위대한 자연이 펼쳐보인 절경의 파노라마를 보며 깊은 사색에 잠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체험했던 자연의 아름다움은 제 심장을 뛰게 만들어 주었고, 그 아름다움 속에 내재된 하나님의 손길에 눈물과 깊은 감동을 경험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을 아름답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교회를 탄생시킬 동일한 능력자가 되심을 확신하며 우리 교회를 그 이듬해에 개척하도록 만드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고도로 발전하고 있는 영상과 연출 기법에 의해서 꾸며진 아름다움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부분과 드러나지 않은 부분의 엄청난 간격을 조작기법에 의해서 감춰버리는 조작된 아름다움. 그것은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많은 양의 물을 담고 자태를 뽐내는 호수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바짝 말라버린 호수 밑바닥이 온갖 쓰레기로 뒤범벅이 되어 있음을 보고난 후 그 호수가 아름답다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진정한 아름다움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의 간격 또한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예수님’이 분명합니다. 역사를 BC와 AD로 나누시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행사하신 예수님은 아름다움의 극치십니다. 이 땅에 오실 때도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으며,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나사렛 시골에서 대부분의 삶을 보내셨고,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감동으로 이끄셨던 예수님의 아름다움에 비교될 존재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름이 조금만 알려져도 남기고 싶은 것, 보이고 싶은 것이 그렇게 많은 법인데 이땅에 신고다니셨던 신발 한켤래 남기지 않으시고, 그 흔한 저서 한권 남기지 않으신 그분의 겸손함 앞에서는 할 말을 잊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편안함을 일찌감치 포기하시고 모든 것을 남김없이 죄인을 위해 쏟아버리신 예수님은 경이로운 아름다움의 절정이요, 결정체입니다. 올해 성탄절기 만큼은 예수님의 아름다움에 깊은 감동을 느끼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움이 배제된 성탄의 아름다움은 조작된 아름다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경건한 무릎을 꿇어보면 어떨까요? 2천년전 흑암을 환히 비춘 예수님의 아름다움에 깊은 전율을 느끼는 은혜를 분명히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분을 그리며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446 목표점이 보여야 합니다 파일
GMC
3267 2013-12-13
"목표점이 보여야 합니다" 플로렌스 채드윅(Florence Chadwick)이란 여자 수영선수가 있었습니다. 1950년대 초에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도버해협을 두번이나 수영으로 건넌 기록을 가진 여성입니다. 그녀는 1952년 7월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롱비치와 카탈리나섬까지의 약 21마일 구간을 수영으로 건너는 도전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당일 기상은 악조건이었습니다.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짙은 안개가 카탈리나섬과 롱비치항구 사이에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짙은 안개에 차단된 햇빛으로 바닷물은 평소보다 훨씬 차거웠습니다. 이를 견디지 못한 플로렌스 채드윅은 15시간 만에 목표지인 롱비치항을 약 800미터 정도 남겨놓은 상태에서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후에 그녀는 자신의 포기에 대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습니다. “만약 해안선만 보였어도 저는 이 일을 해낼 수 있었을 거예요.” 실패의 원인은 목표점을 볼 수 없도록 만들었던 안개였습니다. 그로부터 두달 후인 9월4일, 플로렌스 채드윅은 실패를 교훈삼아 다시 도전합니다. 그날도 기상조건은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짙은 안개가 해안선을 가리우고 있었지만 마음의 눈으로 목표점인 ‘롱비치항’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13시간 47분만에 카탈리나섬과 롱비치간의 태평양 바다를 건너고 맙니다. 목표점이 보이느냐 아니냐는 성공이냐 실패냐를 가늠할 정도의 중요한 사안이 됩니다. 심리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인생에 명확하고도 분명한 목표점을 세우는 사람은 100명 중 5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분명한 목적의식 없이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목표점이 없으면 삶의 동기가 잘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하는 일 또한 포기하고자 하는 유혹에 잘 넘어 갑니다. 더군다나 목표점을 세우지 않으면 삶의 균형이 잘 깨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삶이 좀 어설퍼지기도 합니다. 원을 그릴 때 콤파스를 사용합니다. 콤파스의 한쪽 끝은 뾰족합니다. 그 뾰족한 부분을 백지위에 고정시키고 콤파스를 돌리면 다른 쪽 끝에 달린 연필이 매끄러운 원을 그려냅니다. 이 콤파스를 사용하지 않고 눈대중으로 원을 그리면 아무리 잘 그려도 삐뚤삐뚤한 원이 만들어집니다. 목표점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같은 동그라미를 그려도 목표점을 세우고 그린 동그라미와 목표점 없이 그린 동그라미는 생김새부터 다른 것입니다. 삶이 아름다운 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결같이 명확하고도 분명한 목표점을 설정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목표점으로부터 자신의 눈을 절대로 떼지 않습니다. 성경은 목표점을 세우는 것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잠언 29:18)” 여기서 ‘묵시’는 ‘목표’ 또는 ‘목적의식’이라는 개념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목표점’이 없으면 삶이 흔들릴 수 있음을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목표점에 대해서 바울은 ‘푯대’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14)” 바울 또한 목표점을 설정해 놓고, 그 목표점을 향해 달려가는 경주자의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삶이 그토록 아름다웠나 봅니다. 오늘은 ‘2014년을 위한 비전주일’입니다. 약 보름 앞으로 다가온 새날과 새해를 위해 ‘목표점’을 설정해 보자는 취지에서 ‘다시 꿈을 꾸자’이라는 주제의 하루를 보내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아무도 밟아보지 못한 새로운 365일을 위한 목표점을 설정하시길 바랍니다. 섬길 교회를 주신 하나님의 배려를 따라 각자 섬김의 목표점을 세워보시기 바랍니다. 미래의 사역과 차세대를 위해서 헌신의 목표점을 세워보시기 바랍니다. 목표점이 세워진 후 그 목표점을 응시해 보는 즐거움이 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표점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옮기십시오. 목표점이 점점 가까워짐을 느끼며 삶의 환희와 의미를 분명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과 감사로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445 “통념 깨뜨리기”(2013년 12월 8일) 파일
GMC
3490 2013-12-06
Normal 0 false false false EN-US KO X-NONE <style> /* Style Definitions */ table.MsoNormalTable {mso-style-name:"Table Normal"; mso-tstyle-rowband-size:0; mso-tstyle-colband-size:0; mso-style-noshow:yes; mso-style-priority:99; mso-style-parent:""; mso-padding-alt:0cm 5.4pt 0cm 5.4pt; mso-para-margin-top:0cm; mso-para-margin-right:0cm; mso-para-margin-bottom:10.0pt; mso-para-margin-left:0cm; line-height:115%; mso-pagination:widow-orphan; font-size:11.0pt; font-family:"Calibri","sans-serif"; mso-ascii-font-family:Calibri; mso-ascii-theme-font:minor-latin; mso-hansi-font-family:Calibri; mso-hansi-theme-font:minor-latin;} </style> “통념 깨뜨리기” ‘통념’이란 일반적으로 널리 통하는 개념을 뜻합니다. 그러나 ‘통념’ 가운데 검증되지 않았지만, 마치 그것이 진리처럼 여겨지는 것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검증되지 않은 통념을 진리처럼 여겨졌던 내용들을 역사는 많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구는 편평하고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을 주장한 이후, 이 천동설은 검증절차 한번 거치지 않고 1500년이 넘도록 불변의 진리로 자리매김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통념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가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전혀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이 ‘천동설’이란 통념에 검증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진리는 ‘지구가 둥글며, 그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이 됨을 온 세상에 드러내었습니다. ‘라이트 형제’도 검증되지 않은 통념을 깨고 진정한 진리를 입증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늘을 날기 위해 노력했을 때, 동시대의 물리학의 통념은 ‘인간은 절대로 하늘을 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고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의심없이 받아들여졌고, 당연한 진리인 듯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라이트 형제’는 물리학적 검증을 시도해 결국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고안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행기를 통해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있는 존재임을 온 세상에 드러냅니다. 육상선수는 키가 클수록 불리하다는 것이 육상계의 통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통념을 깨뜨린 사람이 바로 인간탄환이라 알려진 ‘우사인 볼트’입니다. 그는 196 cm의 장신입니다. 키가 너무 크면 공기의 저항을 많이 받기 때문에 절대 유리할 수 없다는 생각은 단지 검증되지 않은 비과학적 통념에 불과함을 ‘우사인 볼트’는 세상에 알립니다. ‘우사인 볼트’는 단거리 육상은 ‘신장’에 달린 것이 아닌 뛰는 자세인 ‘주법’에 달려있는 것임을 확신시킵니다. 성경은 검증되지 않은 통념을 깨버리는 사건이 유달리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투의 승리는 ‘병력과 군사의 수’에 달려있다는 것이 통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게 싸울 군사의 수를 자꾸 줄이고, 무기에 연연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분별력있는 이스라엘의 300용사로 미디안과 아라비아 연합군 13만 5000명을 무너뜨립니다. 기드온이 이끄는 이스라엘 용사들이 사용한 것은 무기라고 말하기조차 우스운 나팔과 횃불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결국 전투의 승리는 병력을 뛰어넘은 ‘분별력’이 있을 때 가능함을 기드온은 온 세상에 드러냅니다. 여리고성은2중 구조를 가진 철옹성입니다. 이 성안으로 침투하기 위해선 ‘공성전’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공성전’이란 적의 성벽높이의 또다른 성을 맞대어 쌓는 전투법을 말합니다. 흙으로 적의 성높이 만큼 쌓아올린 토성 위로 올라가 적의 성안으로 침투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고대 사회의 ‘통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침묵시위’를 선택합니다. 이 침묵시위는 ‘믿음의 시위’를 뜻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침묵시위’는 여리고성을 무너뜨립니다. 이 사건은 ‘공성전’을 벌이지 않고도 성을 점령할 수 있음을 보여준 통념 깨뜨리기의 또 다른 일례였습니다. 통념이라고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검증되지 않은 통념’입니다. 검증되지 않은 통념은 때로 진리를 왜곡시켜 풍성하고도 아름다운 결과를 방해하는 거친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도 검증되지 않은 통념에 때로 반기를 들어보는 것은 창조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래서 안돼” “저래서 안돼”라고 생각되는 일에 한번 스스로 질문을 던져 본 적이 있는지요? “왜 꼭 안된다고 생각할까?”라는 의문으로부터, 그것이 검증된 통념인지 아닌지가 가려집니다. 대부분 우리가 스스로 주장하는 생각들은 사실 검증되지 않은 통념의 카타고리 안에 들어있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사실을 알고 알고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인류를 위한 위대한 공헌자들의 공통점은 ‘통념을 깨뜨린 사람들’입니다. 성경 속에 등장한 믿음의 영웅들도 또한 ‘통념을 깨뜨린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혹 삶에 한번도 검증되지 않은 통념을 마치 진리인양 여기며, 그 검증되지 않은 통념의 노예가 되어 누릴 수 있는 풍요로움을 박탈당한 삶은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 봄직하지 않습니까? 사랑과 감사로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444 ‘우리를 전율케 하는 하나님의 선택’(2013년 12월 1일)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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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1 2013-11-29
Normal 0 false false false EN-US KO X-NONE <style> /* Style Definitions */ table.MsoNormalTable {mso-style-name:"Table Normal"; mso-tstyle-rowband-size:0; mso-tstyle-colband-size:0; mso-style-noshow:yes; mso-style-priority:99; mso-style-parent:""; mso-padding-alt:0cm 5.4pt 0cm 5.4pt; mso-para-margin-top:0cm; mso-para-margin-right:0cm; mso-para-margin-bottom:10.0pt; mso-para-margin-left:0cm; line-height:115%; mso-pagination:widow-orphan; font-size:11.0pt; font-family:"Calibri","sans-serif"; mso-ascii-font-family:Calibri; mso-ascii-theme-font:minor-latin; mso-hansi-font-family:Calibri; mso-hansi-theme-font:minor-latin;} </style> ‘우리를 전율케 하는 하나님의 선택’ 초등학교 때 저는 무척 내성적이었습니다. 그래도 담임선생님의 사랑을 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내성적이어서 선생님의 눈에 드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선생님은 간혹 교무실로 학생들을 심부름 보내시곤 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교무실에 심부름 다녀올 사람…”하며 심부름을 할 아이를 찾으셨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들고 “저요! 저요!”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심지어 어떤 아이는 책상 위로 올라가서 어떡하든 선생님의 눈에 들기 위하여 손을 번쩍들고 풀쩍 풀쩍 뛰며 자기를 뽑아달라고 애를 쓰는 녀석도 있었습니다. 결국 선생님의 선택을 받은 아이는 무슨 개선장군이 된 듯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의 선택을 받은 아이를 바라보는 다른 아이들은 너무 부러워서 시샘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담임선생님은 또 교무실로 심부름 할 아이를 찾으셨습니다. 어떤 아이는 손을 들고, 어떤 아이는 책상 위로 올라가고… “저요! 저요!”를 외치면서 선생님의 지명을 애타게 구했습니다. 성격이 조용한 탓에 아무 기대감 없이 소극적으로 손을 들었습니다. 제가 뽑힐 것이라곤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한채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이 저를 지목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지성이가 교무실에 다녀와” 그 순간 교실은 조용한 적막에 쌓였습니다.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충격이었습니다. 그리 소극적인 이 김지성이를 선생님이 지명하실 줄은 그 누구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40여년이 지난 머나먼 옛날의 이야기지만, 전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감격에 감격… 제가 선생님의 눈에 들었다는 감격… 제가 선생님을 위해 선택받았다는 그 감격… 그 감격 때문에 말입니다. 간혹 그리스도인으로서 ‘항상 기뻐하라’는 성경의 명령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 있습니다. 사실 이에 대한 답변은 쉽지가 않습니다. 분명 그리스도인으로서 ‘항상 기쁨의 삶’은 성경의 명령임을 알지만,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기쁨의 정도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도 때론 기쁨이 완전히 상실된 순간도 있음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저는 ‘하나님의 선택’을 생각해 봅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선택이 저를 기쁘게 만든 이유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선택은 황홀함을 느끼게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음을 말입니다. 온 우주를 지배하시며, 모든 것의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자격으로 따지자면 무자격자인 ‘나’를 지명하여 선택해 주셨다는 그 사실은 삶을 전율케 만드는 이유가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현실의 조건과 환경은 우리를 피곤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악을 써도 기쁨은 가식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 현실일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할 줄 몰라 기쁨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기쁨을 누릴 분명한 이유가 없기에 기쁨이 메말랐음을 하나님은 모르시는지… 야속하게도 성경은 항상 기뻐하는 삶을 자꾸만 강조합니다. 그래서 더 피곤해 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애써 외면해도 절대로 바뀔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신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 속에는 이 부인할 수 없는 ‘선택’이라는 중요한 명제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따스하고 사랑스런 눈길이 머문 인생이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택이 내 삶에 임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너무 큰 분, 너무도 위대하신 분, 그리고 너무도 영광스러운 분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음을 기억해 봅시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자신에게 머문 예수님의 시선 때문에 너무도 기뻐하며 즐거워했던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가 품었던 그 충만한 감동은 반드시 우리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과 감사로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443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 (2013년 11월 24일) 파일
GMC
4023 2013-11-22
Normal 0 false false false EN-US KO X-NONE <style> /* Style Definitions */ table.MsoNormalTable {mso-style-name:"Table Normal"; mso-tstyle-rowband-size:0; mso-tstyle-colband-size:0; mso-style-noshow:yes; mso-style-priority:99; mso-style-parent:""; mso-padding-alt:0cm 5.4pt 0cm 5.4pt; mso-para-margin-top:0cm; mso-para-margin-right:0cm; mso-para-margin-bottom:10.0pt; mso-para-margin-left:0cm; line-height:115%; mso-pagination:widow-orphan; font-size:11.0pt; font-family:"Calibri","sans-serif"; mso-ascii-font-family:Calibri; mso-ascii-theme-font:minor-latin; mso-hansi-font-family:Calibri; mso-hansi-theme-font:minor-latin;} </style>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 1979년 2월, 심하게 쏟아진 겨울비 때문에LA근교 말리부 해안에서 산사태가 일어났습니다. 그 때에 산 위에 있던 12.5톤짜리 바위 하나가 산 아래로 굴러 내려오다가 1번 ‘퍼스픽 코스트 하이웨이’ 바로 위쪽 언덕에 멈춰 섰습니다. 바위 바로 아래는 수많은 차량들이 오가는 도로요, 주택과 상가들이 밀집해 있는 곳입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했습니다. 당국은 도로를 통제하고 그 바위를 다른 지역으로 옮겼습니다. 그 때 호주의 조각가 ‘브레트 리빙스톤 스트롱’ 이 그 바위를 사겠다고 나섰습니다. 그 바위를 100달러에 사서 호주까지 수송하는 데 2천 5백 불이 들었습니다. 그는 8주에 걸쳐 그 바위에 배우 존 웨인의 얼굴을 조각했습니다.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었던 영화 배우 존 웨인은 암으로 투병 중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경매에 붙여졌고 한 미국단체에서100만 달러에 사서 헐리우드의 차이니스 맨스(Chinese Mann’s Theater)극장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존 웨인의 암센터는 그 조각된 존 웨인 상을 통해 모금한 돈으로 세워지게 됩니다. 이 조각상은 현재 텍사스의 러복 크리스챤 대학(Lubbock Christian University) 캠퍼스 내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34년전 일어났던, 지금은 거의 잊혀진 이 일화가 교훈을 줍니다.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하지 못했던 굴러 떨어진 바위는 유명 조각가에 의해 만인에게 감동을 주는 존재로 바뀝니다. 존 웨인의 조각상으로 바뀐 바위는 암으로 신음하는 환자들에게 한줄기 소망의 빛이 되는 암센터 건립의 주춧돌이 되는데 사용됩니다. 브레드 리빙스톤 스트롱이 지불했던 100달러에 대해서 조차 “쓸모 없는 바위에 무슨 100달러나 지불하는가”라는 비아냥 소리를 들을 정도의 가치판정을 받았던 바위였습니다. 그러나 재능있는 창조자의 손에 맡겨진 바위는 8주만에 100만 달러의 가치로 재탄생합니다. 아마도 그 바위가 말리부 언덕 원래의 위치에 있을 때는 사람들 눈에 멋있게 비춰졌을 것입니다. 어쩌면 탁트인 태평양이 조망되는 언덕 위의 그 바위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이 대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위가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를 변경하니 일시에 천덕꾸러기가 됩니다. 사람들이 몹시도 싫어하는 불안감을 조성하는 존재로 찍혀버립니다. 그러나 그 바위가 다시 예술가 앞으로 들어가 재창조의 작업을 거치니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경이로운 존재로 바뀝니다. 서 있어야 할 위치가 중요합니다. 내가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평가와 가치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자신이 서있어야 할 위치를 정확히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 자리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 앞을 벗어나 위치를 변경하면 평가가 달라집니다. 천덕꾸러기로 전락합니다. 만약 그 위치를 변경했다면 다시 본래의 위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을 벗어난 홀로서기는 가치하락을 의미합니다. 꼭 있어야 할 자리가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자리요, 최상의 자리입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어 있어야 할 자리는 ‘예배의 자리,’ ‘감사의 자리’, ‘기도의 자리’, 그리고 ‘찬송의 자리’ 뿐입니다. 그 외는 한눈조차 팔아서 안될 자리임이 분명합니다. 사랑과 감사로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442 “다 늦게 발견한 평범한 깨달음” (2013년 11월 17일)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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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5 2013-11-15
Normal 0 false false false EN-US KO X-NONE <style> /* Style Definitions */ table.MsoNormalTable {mso-style-name:"표준 표"; mso-tstyle-rowband-size:0; mso-tstyle-colband-size:0; mso-style-noshow:yes; mso-style-priority:99; mso-style-parent:""; mso-padding-alt:0cm 5.4pt 0cm 5.4pt; mso-para-margin-top:0cm; mso-para-margin-right:0cm; mso-para-margin-bottom:10.0pt; mso-para-margin-left:0cm; line-height:115%; mso-pagination:widow-orphan; font-size:11.0pt; font-family:"Calibri","sans-serif"; mso-ascii-font-family:Calibri; mso-ascii-theme-font:minor-latin; mso-hansi-font-family:Calibri; mso-hansi-theme-font:minor-latin;} </style> “다 늦게 발견한 평범한 깨달음” “신앙생활 중 제일 즐거운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난 주저함 없이 ‘묵상’이다라고 말하겠다” QT를 너무 사랑하는 제 친구 목사가 한 말입니다. 이 분은 예수님을 삶의 구세주로 받아들인 후 QT를 삶의 동력화시킨 분입니다. “인생이 아무리 힘들어도 힘들지 않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난 묵상의 과정을 통해서 터득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 말이 빈말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분의 표정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늘 기쁨과 확신이 충만합니다. 그 분의 목회 현장을 방문하면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음을 발견합니다. 몇 명 안 되는 교인들, 예배드릴 공간을 찾지 못해 이리 저리 예배 처소를 옮겨야 하는 현실. 거기다가 건강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 무슨 즐거움이 그분에게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의 냉혹한 삶의 조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만날 때 마다 그 분의 깊은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을 접하게 됩니다. 너무나 부러운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도대체 힘든 현실과 분명 부조화된 그 기쁨의 정체는 무엇인가?”라는 나의 질문에 대해 그 분은 ‘묵상’을 언급했습니다. “묵상을 하면 할수록 그 어느 것으로 얻을 수 없는 분명한 확신을 얻게 된다네. 하나님이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실행하고 계심을 말일세” 같은 목회자로 살아가지만 기쁨을 누리는 정도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30여년 넘게 QT와 함께하는 신앙생활을 이루고 있지만, 매일의 삶과 연관된 기쁨을 폭포수처럼 쏟아내지 못하는데… 제 친구가 표현하는 일상생활에서 터져 나오는 주체할 수 없는 희열은 나를 몹시도 당황하게 만듭니다. “은혜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사람마다 경험하는 감동은 다를 수 밖에 없다”라고 애써 변명해 보지만 왠지 모르게 궁색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래도 제자훈련을 시키며 ‘묵상’의 유익을 강조하는 나인데… 그럼에도 그 분 앞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평강의 포스 앞에서 그만 주눅이 들곤 합니다. 무엇이 다를까? 왜 그와 나의 묵상의 결과는 이리 다를까? 그런데 오늘에서야 그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묵상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저의 ‘묵상’은 늘 결과를 기대하는 묵상이었습니다. 묵상 후에 찾아오는 평강을 전제로 묵상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 친구의 ‘묵상’은 사뭇 달랐습니다. 그 분은 묵상 자체를 즐겼습니다. 삶이 어지러워도 묵상이 즐거우니까 묵상의 자리를 찾은 것입니다. 언뜻 생각할 때는 같은 의미 아닌가라고 여겨질 수 있지만 이는 한참 다른 것입니다. 조건의 유무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묵상 속에서 만나는 주님을 즐거워하는 태도와, 무언가 얻기 위해서 주님을 찾는 것은 애초부터 태도가 다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을 만나도 무언가 얻기 위한 목적으로 만나는 것과, 그 사람과의 만남 자체를 기뻐하여 만나는 것이 다르듯 말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의미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의 결과 때문에 기뻐한다면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날 사랑하시는 주님 때문이라면 항상 바보처럼 웃으며 기뻐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열쇠였습니다. 당연한 듯 싶은 내용을 산전수전 다 겪고 이제 노련미와 연륜이 서서히 나타날 이 나이에야 깨닫다니… 나는 그래서 아직도 영적 내공에서는 한참 먼 목회자가 분명합니다. 사랑과 감사로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441 ‘긴급한 일의 횡포’ (2013년 11월 10일)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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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3 2013-11-08
Normal 0 false false false EN-US KO X-NONE <style> /* Style Definitions */ table.MsoNormalTable {mso-style-name:"표준 표"; mso-tstyle-rowband-size:0; mso-tstyle-colband-size:0; mso-style-noshow:yes; mso-style-priority:99; mso-style-parent:""; mso-padding-alt:0cm 5.4pt 0cm 5.4pt; mso-para-margin-top:0cm; mso-para-margin-right:0cm; mso-para-margin-bottom:10.0pt; mso-para-margin-left:0cm; line-height:115%; mso-pagination:widow-orphan; font-size:11.0pt; font-family:"Calibri","sans-serif"; mso-ascii-font-family:Calibri; mso-ascii-theme-font:minor-latin; mso-hansi-font-family:Calibri; mso-hansi-theme-font:minor-latin;} </style> ‘긴급한 일의 횡포’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것 중 하나는 ‘의도하지 않은 일’이 꽤 많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번 한주간이 그런 주간이었습니다. 계획하기로는 3024 강력기도운동이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였습니다. ‘기도’에 강력하게 집중해 볼 계획이었습니다. 주말에 대각성집회도 있고, 교우들을 위한 중보기도에 대한 강한 부담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철야기도를 하면서 ‘기도에 대한 강한 몰입’을 시도해 보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계획을 밀고 나가기에는 역부족이다 여겨질 만큼 많은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엄습해 왔습니다. 원래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는 멀티태스킹과는 거리가 먼 스타일인지라, 허둥지둥대는 분주함으로 오히려 기도에서 한발치 먼 한주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가지 일을 처리했나 싶으면 예상치 않은 또 다른 일이 저의 조급함을 부추기는 이 희한한 현상 앞에서 급기야 탈진마저 경험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금요일 새벽.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 몸이 무겁습니다. 높고 높은 고층 빌딩의 난간에서 다리를 헛디뎌 그만 까마득한 아래로 추락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강력기도운동 기간 모든 새벽예배의 메세지를 전하겠다는 일념이 있었지만, 오늘은 그 약속마저도 지키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3024 강력기도운동의 최일선에서 기도를 이끌어 가겠노라는 의지를 불태웠었는데… 제대로 그 계획을 이행하지 못한 애통하는 자책감(?)으로 천근만근 무거운 무릎을 억지로 굴복시켜 봅니다. 이 한주간 가장 중요한 일 ‘기도’가 왜 가장 중요한 취급을 받지 못했을까… 머리 속에 이 한가지 질문만이 맴돌 뿐입니다. 제자반에서 필독서로 읽고 있는 ‘찰스 험멜’의 ‘늘 급한 일로 쫓기는 삶’이란 책자가 생각납니다. 이 책의 원제는 ‘긴급한 일의 횡포’입니다. 저자는 ‘긴급한 일’과 ‘중요한 일’을 나누어 다루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일반적으로 ‘중요한 일’은 ‘긴급한 일’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알고보면 긴급하다고 꼭 중요한 일은 아닌 경우가 다반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찰스 험멜’은 그의 저서 제목을 ‘긴급한 일의 횡포’로 잡은 것입니다. 긴급한 일은 중요한 일마저 잊도록 만드는 ‘횡포’를 부리는 악질(?)이라는 뜻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정말 이번 한주간은 ‘긴급한 일’에 의해서 ‘횡포’를 당한 것 같습니다. 긴급한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긴급한 일인 ‘기도의 시간’을 빼앗아 도주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정직하게 생각하고, 또 되새겨 보니 긴급한 일로부터 ‘기도의 시간’을 강탈당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긴급한 일’의 위력 앞에 제가 지레 겁먹고 자진 반납했다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이 될 듯 싶습니다. ‘긴급한 일’로 부터 횡포를 당했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합니다. ‘긴급한 일’의 허세 앞에서 기가 눌려 가장 긴급한 일인 ‘기도’를 포기해 버린 것이 더 정확한 말이 맞습니다. 늘 ‘긴급한 일’은 중요한 일을 강탈해 가는 ‘횡포자’로 여겼는데 이제야 발견하는 것은 ‘긴급한 일’은 그런 횡포를 부릴 수 있는 능력조차 없다는 점입니다. 긴급한 일은 횡포자처럼 허세를 부리기에 그리 보일 뿐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허세 앞에 의기소침해 있었던 제 자신이었습니다. 속이 많이 상합니다. ‘긴급한 일’의 허세 앞에 기가 눌려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긴급한 일인 ‘기도’를 자진반납했다니… 무거운 무릎을 꿇고 가장 중요한 일 ‘기도’를 다시 되찾아 오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아셨는지 성령께서 많이 위로해 주십니다. 그래도 이런 허한 마음에 위로가 되는 중요한 포인트.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다” 마틴 루터는 할 일이 너무 많아 바빠지자 기도의 시간을 오히려 더 늘렸다고 했습니다. 마틴 루터의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은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하는 개념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앞으로 ‘긴급한 일’ 앞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절대로 자진 반납하지 않으렵니다. 다시 기도의 자리로 돌아오며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440 “인생점검” (2013년 11월 3일)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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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1 2013-11-01
Normal 0 false false false EN-US KO X-NONE <style> /* Style Definitions */ table.MsoNormalTable {mso-style-name:"표준 표"; mso-tstyle-rowband-size:0; mso-tstyle-colband-size:0; mso-style-noshow:yes; mso-style-priority:99; mso-style-parent:""; mso-padding-alt:0cm 5.4pt 0cm 5.4pt; mso-para-margin:0cm; mso-para-margin-bottom:.0001pt; mso-pagination:widow-orphan; font-size:10.0pt; mso-bidi-font-size:11.0pt; font-family:"맑은 고딕"; mso-ascii-font-family:"맑은 고딕"; mso-ascii-theme-font:minor-latin; mso-fareast-font-family:"맑은 고딕"; mso-fareast-theme-font:minor-fareast; mso-hansi-font-family:"맑은 고딕"; mso-hansi-theme-font:minor-latin; mso-font-kerning:1.0pt;} </style> Normal 0 false false false EN-US KO X-NONE 인생점검 4년 넘게 탄 제 자동차의 타이어가 참 많이 닳아서 이런 저런 이유로 미루던 타이어를 새 것으로 교체했습니다. 타이어를 교체하며 정비사로부터 타이어를 교체해야 할 이유를 설명 들었습니다. 오래된 타이어를 교체하지 않으면 빗길에서 잘 미끄러져 심각한 교통사고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오래된 타이어를 교체하지 않으면 자동차 연료소모량이 많아지는 원인도 될 수있다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비가 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정비사의 조언은 저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장기적으로 자동차 연료비에 적지 않은 손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또한 마음에 걸렸습니다. 결국 안전과 경제적 이유에서 오래된 타이어를 새로운 타이어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하고 타이어 모두를 교체하였습니다. 무슨 물건이든 오랫동안 사용하다 보면 닳게 되어 있습니다. 많이 닳았다는 것은 그만큼 사용했다는 뜻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효율성도 떨어졌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용하는 물건들은 일정한 기간이 되면 정비를 하거나,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오랫동안 반복되는 일상적인 생활은 한번쯤 점검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별 문제가 감지되지 않기에 삶의 패턴을 바꾸는 것을 생각조차 해보지 않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데 굳이 생활의 패턴에 변화를 줄 필요성이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삶에 위기의 순간이 오면 그것 때문에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점검되지 않은 생활의 패턴이 오히려 삶의 손실을 초래하고 있는 주범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익숙하지만, 오래 반복된 생활의 패턴은 반드시 점검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폴 페어솔’이라는 임상 심리학자는 점검되지 않은 일상의 패턴이 가져다 주는 피해 사례를 수집하며 ‘삶의 점검’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삶의 최대의 적은 ‘익숙한 삶’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더욱 풍성하고 신나는 믿음의 여정을 이루기 위해서 ‘믿음생활의 패턴’을 점검해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아무 문제없는데…”라는 느낌을 신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생활 바꾸긴 바꾸어야 하는데… 좀 더 있다 해보지 뭐.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라는 생각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어서도 안됩니다. 어느 상담가는 인생을 망가뜨리는 무서운 생각을 “No problem (아무 문제 없어)”과 “ Not yet (나중에)”이라는 두개의 표현으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점점 깊어가는 가을에 ‘인생점검’과 ‘신앙점검’을 해볼 의향이 없으신지요? 별 문제없어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필요하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인생점검에 관심이 없으시다면 나중에 후회만이 남을 뿐입니다. 안전과 경제적 이유 때문이라도 자동차 타이어를 점검받고 교체하기도 하는데 자동차보다 훨씬 소중하고 귀한 인생이야 더 이상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사랑과 감사로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style> /* Style Definitions */ table.MsoNormalTable {mso-style-name:"표준 표"; mso-tstyle-rowband-size:0; mso-tstyle-colband-size:0; mso-style-noshow:yes; mso-style-priority:99; mso-style-parent:""; mso-padding-alt:0cm 5.4pt 0cm 5.4pt; mso-para-margin:0cm; mso-para-margin-bottom:.0001pt; mso-pagination:widow-orphan; font-size:10.0pt; mso-bidi-font-size:11.0pt; font-family:"맑은 고딕"; mso-ascii-font-family:"맑은 고딕"; mso-ascii-theme-font:minor-latin; mso-fareast-font-family:"맑은 고딕"; mso-fareast-theme-font:minor-fareast; mso-hansi-font-family:"맑은 고딕"; mso-hansi-theme-font:minor-latin; mso-font-kerning:1.0pt;} </style>
439 “다시 시작하는 강력기도” (2013년 10월 27일) 파일
GMC
3463 2013-10-25
Normal 0 false false false EN-US KO X-NONE <style> /* Style Definitions */ table.MsoNormalTable {mso-style-name:"표준 표"; mso-tstyle-rowband-size:0; mso-tstyle-colband-size:0; mso-style-noshow:yes; mso-style-priority:99; mso-style-parent:""; mso-padding-alt:0cm 5.4pt 0cm 5.4pt; mso-para-margin-top:0cm; mso-para-margin-right:0cm; mso-para-margin-bottom:10.0pt; mso-para-margin-left:0cm; line-height:115%; mso-pagination:widow-orphan; font-size:11.0pt; font-family:"Calibri","sans-serif"; mso-ascii-font-family:Calibri; mso-ascii-theme-font:minor-latin; mso-hansi-font-family:Calibri; mso-hansi-theme-font:minor-latin;} </style> “다시 시작하는 강력기도” 스웨덴의 화학자 알프레드 노벨은 자신이 만든 폭약의 위력에 놀라워했습니다. 강한 폭발력을 기대하고 만들었지만 막상 만들어 놓으니 그 위력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훗날 알프레드 노벨은 그 폭약에 ‘다이나마이트’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다이나마이트’는 ‘강력한 능력’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단어 ‘두나미스(δυναμις)’를 어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대한 것보다 훨씬 큰 ‘강력한 능력’을 드러냈던 다이나마이트에 발명자 자신이 스스로 깊은 충격에 빠졌던 일화는 두고두고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작년에 3024 강력기도 운동을 진행하면서 이와 비슷한 고백을 하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기도의 위력을 알았지만 이정도일줄 몰랐다”라는 고백입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있다는 것은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본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시작한 기도의 파워에 기도자 자신이 스스로 놀라워했습니다. 간절한 기도가 필요해서 시작했던 30일간의 24시간 연쇄기도를 통해서 신앙과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좀더 편안하고 안락한 미래를 꿈꾸며 기도에 매달렸던 성도가 ‘잊혀진 사명’을 뒤늦게 발견하고 자신의 인생목표를 대폭수정하기도 했습니다. 복잡한 현실을 피해 기도의 자리에 나아왔던 한 성도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평강의 폭포수’를 경험하고 삶이 이렇게 아름다운줄 예전에 미처 몰랐었다라는 감격의 표현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1시간을 기도할 수 있나요”라며 기도에 난감해 했던 한 성도는“기도만큼 신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라며 기도의 즐거움을 피력했습니다. 교역자들 또한 강력기도를 통해서 헌신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이구동성으로 표현했습니다. 주님께서 이끌어주신 평생목회의 길에 헌신은 당연한 것이라고 늘 고백했지만 기도하는 동안 그 헌신은 특권이요, 축복이라는 잊혀진 사실을 깨닫고 목놓아 울었다는 교역자도 있었습니다. 3024 강력기도 운동 후 플로리다 올랜도의 담임목사로 사역지를 옮긴 한 교역자는 “힘들었지만 다시 할 수 밖에 없는 기도”를 추억하며 30일 철야기도를 선언했습니다. 멋있는 목회를 꿈꾸며 성실하게 단독목회를 준비하던 한 교역자는 대학생 시절 돕기로 다짐했던 북녘동포들을 위한 사역자로 재헌신과 더불어 미지의 땅으로 주저없이 떠났습니다. 삶의 의미를 바꾸고, 인생의 목적과 목표를 다시 찾도록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그 기도가 못내 그리워 제2차 3024 강력기도운동을 다시 전개합니다. “요즘 철야기도하는 교회가 어디 있나요?” “요즘 그리 빡세게 성도들을 몰아붙이는 교회가 어디 있나요?” “기도는 잘하는 분들이 하실 일이지 저는 아직 신앙의 연륜이 짧아서…” 기도에 강한 부담을 가지면 기도하지 못할 이런 저런 이유가 수만가지도 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기도하고 싶어서, 그 기도의 강한 위력을 잊을 수가 없어서 기도의 자리를 다시 찾으려 합니다. 일상의 목회를 진행하면서 기도의 자리로 나아올 것입니다. 때론 오전에, 때론 한낮에, 때론 저녁시간에, 때론 깊은 밤에 130대 기도문을 읊으면서 기도의 능력을 만끽하려 합니다. 3024 강력기도운동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도는 머리로 하는 행위가 아닌 무릎으로 하는 행위라는 평범한 원리를 한번쯤 적용해 보겠다는 편한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아무 때라도 내가 소속한 교회의 본당에서 한번쯤 기도의 소리를 높여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편한 생각을 가지면 됩니다. 이미 만들어진 130대 기도문을 하나님 앞에서 읽어본다는 편한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꼭 그렇게 하십시오. 그런데 말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기도 후에 드러나는 강력기도의 능력은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일이 될 듯 싶습니다. 그것만큼은 제가 책임질 영역은 아니기에... 강력기도의 자리에 서며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438 “착각이 문제” (2013년 10월 20일) 파일
GMC
3581 2013-10-18
Normal 0 false false false EN-US KO X-NONE <style> /* Style Definitions */ table.MsoNormalTable {mso-style-name:"표준 표"; mso-tstyle-rowband-size:0; mso-tstyle-colband-size:0; mso-style-noshow:yes; mso-style-priority:99; mso-style-parent:""; mso-padding-alt:0cm 5.4pt 0cm 5.4pt; mso-para-margin:0cm; mso-para-margin-bottom:.0001pt; mso-pagination:widow-orphan; font-size:10.0pt; mso-bidi-font-size:11.0pt; font-family:"맑은 고딕"; mso-ascii-font-family:"맑은 고딕"; mso-ascii-theme-font:minor-latin; mso-fareast-font-family:"맑은 고딕"; mso-fareast-theme-font:minor-fareast; mso-hansi-font-family:"맑은 고딕"; mso-hansi-theme-font:minor-latin; mso-font-kerning:1.0pt;} </style> “착각이 문제” 인터넷상에서 ‘착각’에 대한 연관 검색어들을 찾으면 재미있는 유머들이 참 많이 뜹니다. 예를 들면 “울고 떼쓰면 다 되는 줄 안다 (꼬마들의 착각).” “자기 자식은 머리는 좋은데 열심히 안해서 공부 못하는 줄 안다 (엄마들의 착각).” “자식들이 나이 들면 효도할 줄 안다 (부모들의 착각).” “자기들은 절대 아줌마가 안될 줄 안다 (젊은 여성들의 착각)” “결혼만 하면 깨가 쏟아질 줄 안다 (연애하는 남녀들의 착각).” “살림하는 여자들은 집에서 노는 줄 안다 (남편들의 착각).” 읽으면 공감이 되기에 웃음이 나옵니다. 공감이 되었다는 말은 나 자신도 착각에서 결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님을 인정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찌보면 사람은 착각의 동물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착각’이란 단어는 사실과는 동떨어진 생각이나 개념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객관성이 희박하고, 극단적인 주관성을 전제로 하는 판단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차이가 조금씩은 있겠지만 ‘착각’에 의한 판단 실수를 할 때가 참 많습니다. 착각은 인간의 근원적 문제인 ‘타락’의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처럼 지혜로워져 선악을 알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착각이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에 손을 대도록 만들었습니다. 잠언을 읽다가 눈이 휘둥그래질 구절을 접했습니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잠언 26:12)” 성경은 사람이 착각의 존재임을 꿰뚫고 있음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자신의 판단과 생각이 옳다고 여기는 것처럼 미련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은 착각할 때 희망부재 속으로 추락하고 만다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릴 때 재미있게 읽었던 이솝 우화에 나오는 스토리가 생각납니다. 『옛날 어떤 나라에 임금님이 있었다. 종종 임금님은 화려하게 장식된 당나귀를 타고 나라를 순시했다. 국민들은 당나귀에 올라타고 나라를 순시하는 임금님에게 갈채와 찬사를 보냈다. 이러한 갈채와 환호에 고무된 나귀는 어느날 임금님을 땅에다 내동댕이쳤다. 그 환호와 갈채가 자기에게 오는 줄 착각하고 극도로 흥분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귀에게는 참수형이 내려졌다.』 이솝 우화를 통해서 큰 교훈을 얻습니다. 착각은 교만의 이유가 됩니다. 더 나아가 착각은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인지라 착각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고까지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한 스스로 착각하지 않도록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무척 중요합니다. 착각하지 않기 위해서 이런 원리를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나의 판단보다 더 중요한 판단은 다른 사람의 판단이다. 다른 사람의 판단보다 더 중요한 판단은 하나님의 판단이다” 하나님의 판단이 모든 판단보다 상위에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성경 안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사랑과 감사로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437 “인생을 반전시킬 은혜의 단비” (2013년 10월 13일)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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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5 2013-10-11
Normal 0 0 2 false false false EN-US KO X-NONE <style> /* Style Definitions */ table.MsoNormalTable {mso-style-name:"Table Normal"; mso-tstyle-rowband-size:0; mso-tstyle-colband-size:0; mso-style-noshow:yes; mso-style-priority:99; mso-style-parent:""; mso-padding-alt:0in 5.4pt 0in 5.4pt; mso-para-margin:0in; mso-para-margin-bottom:.0001pt; mso-pagination:widow-orphan; font-size:10.0pt; mso-bidi-font-size:11.0pt; font-family:"맑은 고딕"; mso-ascii-font-family:"맑은 고딕"; mso-ascii-theme-font:minor-latin; mso-fareast-font-family:"맑은 고딕"; mso-fareast-theme-font:minor-fareast; mso-hansi-font-family:"맑은 고딕"; mso-hansi-theme-font:minor-latin; mso-font-kerning:1.0pt;} </style> “인생을 반전시킬 은혜의 단비” 계절의 변화를 보면 인생이 재조명됩니다. 절대로 물러설 것 같지 않던 한여름의 강력한 더위도 정해진 계절에는 어김없이 물러갑니다. 한주 전까지만 해도 교회 주차장에 세워놓은 자동차의 문을 열다가 손가락에 가벼운 화상을 입었을 정도로 한낮의 태양빛은 강렬했었습니다. 뜨거운 바람에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정도로 힘들게 했던 무더위의 횡포에 고통스러워 했었습니다. 기나긴 여름의 행렬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왠지 가을은 그리다가 지쳐버릴 미지의 손님마냥 낯설게만 느껴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주만에 가을을 느끼게 됩니다. 어제 가을을 초청하는 차가운 비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뜨겁고 건조한 산타아나 바람의 영향으로 가을의 문턱에 접어들었지만 가을같지 않던 남가주에 비가 한번 쏟아지고 나더니 가을의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밤에는 벽난로에 불을 지폈는지 장작타는 향긋한 냄새가 이른 비 덕에 촉촉해진 공기를 타고 콧속으로 스며듭니다. 한주간 전만해도 물러설 것 같지 않던 여름의 횡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무리 위풍당당한 여름이라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의 질서 앞에서는 무기력할 수 밖에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정말 긴팔 외투나 가디건을 걸쳐야 할 가을이 단 하루 만에 찾아 온 것입니다. 도로변에 위치한 커피 전문점에서 진한 커피향이 흘러나옵니다. 한주전만 해도 뜨거운 바람 냄새, 건조한 사막냄새로 코끝이 어지러웠는데, 커피향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만들어집니다. 한여름 머리 꼭대기에서 작열하는 태양은 삶의 여유를 빼앗아 가버린 후 돌려줄 것 같지 않은 위세를 자랑했었습니다. 그러나 차갑게 흘러내린 촉촉한 10월의 빗줄기는 아쉽게 도둑맞은 삶의 여유를 되찾아 주었습니다. 가을의 정취가 생활의 활력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어제 내린 차거운 빗줄기가 가져다 준 축복입니다. 10월의 비가 만들어준 놀라운 반전입니다. 깊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삶 속에도 이런 빗줄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삶을 어지럽히는 각종 뜨거운 사건들… 절대로 물러설 것 같지 않는 이들의 횡포. 이런 저런 문제 때문에 다른 생각에 집중할 수 없는 인생의 무더위 한복판에 우리가 서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여유조차 강탈당한 채 깊은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절대로 기약할 수 없는 삶의 반전을 신기루처럼 허망하게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한줄기 은혜의 단비가 쏟아져 내린다면 단 하루만에 인생의 반전을 경험할 수 있음을 가을을 재촉한 10월의 비를 통해 확신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은혜의 빗줄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 빗줄기는 하늘에서 쏟아져 내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무더운 여름을 물러서게 만들며 가을을 재촉한 비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듯이 말입니다. 가을비든 은혜의 단비든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우리의 눈을 하늘로 돌려야겠습니다. 은혜의 단비가 내리면 반전의 역사가 만들어집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은혜의 비를 고대합시다. 삶을 뒤집어 놓을 놀라운 반전이 시작되기 떄문입니다. “주여, 우리에게 은혜의 단비를 허락하옵소서” 은혜의 단비를 기다리며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436 “역전 홈런” (2013년 10월 6일)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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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1 2013-10-04
Normal 0 0 2 false false false EN-US KO X-NONE <style> /* Style Definitions */ table.MsoNormalTable {mso-style-name:"Table Normal"; mso-tstyle-rowband-size:0; mso-tstyle-colband-size:0; mso-style-noshow:yes; mso-style-priority:99; mso-style-parent:""; mso-padding-alt:0in 5.4pt 0in 5.4pt; mso-para-margin-top:0in; mso-para-margin-right:0in; mso-para-margin-bottom:10.0pt; mso-para-margin-left:0in; line-height:115%; mso-pagination:widow-orphan; font-size:11.0pt; font-family:"Calibri","sans-serif"; mso-ascii-font-family:Calibri; mso-ascii-theme-font:minor-latin; mso-hansi-font-family:Calibri; mso-hansi-theme-font:minor-latin;} </style> “역전 홈런” 스포츠에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도 열광하도록 만드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대역전의 순간입니다. 한참 뒤지고 있는 게임이 한순간 뒤집어지는 장면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포츠에 정신없이 빠져들게 만드는 주범이 됩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대역전의 경기가 있습니다. 1988년 LA다저스와 오클랜드A’s와의 월드시리즈 1차전 경기입니다. 야구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실력면에서 월등한 오클랜드 A’s의 일방적 승리를 예상했습니다. 예상대로 오클랜드A’s는 막강한 타력으로 LA다저스를 무력화 시켰고 무난히 월드시리즈 1차전의 승리를 가져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게임은 끝나봐야 하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LA 다저스의 토미 라소다 감독은 3대4로 뒤진 9회말 2아웃, 주자1루 상황에서 대타로 커크 깁슨을 내세웠습니다. 모두들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커크 깁슨은 앞선 경기에서 왼쪽 허벅지 근육과 오른쪽 무릎을 다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바이러스성 장염에 걸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깁슨은 다리를 절룩이며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상대 오클랜드 A’s의 마무리 투수는 그해 45세이브를 거둔 당시 최고의 마무리 데니스 애커슬리였습니다. 오클랜드A’s와 팬들은 오클랜드A’s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9회말 2아웃 볼카운트는 0볼 2스트라이크. 이제 스트라이크 하나만 허용하면 LA다저스는 패배하는 상황입니다. 깁슨은 놀라운 집중력으로 볼 3개를 골라냈습니다. 드디어 모든 사람을 긴장시키는 풀카운트. 그리고 메이저리그 사상 가장 극적인 홈런이 나왔습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커크 깁슨은 애커슬리의 바깥쪽 공을 걷어 올려 끝내기 역전 홈련을 만들었습니다. 깁슨은 절뚝거리며 베이스를 돌면서도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습니다. 관중들의 함성, LA다저스 선수들은 그라운드로 뛰어나와 서로 부둥켜 안으며 대역전의 감격을 만끽했습니다. 이 게임으로 탄력을 받은 다저스는 그해 월드시리즈에서 4승1패로 우승을 일궈냈습니다. 그 꿈같던 게임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팬들의 머리속에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경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결코 잊혀지지 않는 경기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역전 드라마였기 때문입니다. ‘이젠 끝났구나’라고 생각되는 순간, 판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분명한 판단이 내려진 순간 일구어낸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그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이라 여기기에는 너무도 그 모양이 연약한 자가 터뜨린 끝내기 홈런 때문이었습니다. 역시 게임은 끝나봐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게임을 본 이후로 야구에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야구의 묘미를 느꼈던 것입니다. 무모한 도전이라 생각되는 것도 허용되는 야구의 필드가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나서도 역부족일텐데 최악의 컨디션에도 역전을 만들 수 있는 야구장이 삶에 교훈을 준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구 경기를 중계하는 해설자가 한 말이 떠오릅니다. “야구는 삶과 똑같습니다. 야구를 통해서 난 인생의 원리를 배웁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삶에도 대역전이 허용될 것입니다. 그것도 절대로 못할 것 같은 인생을 통해서 말입니다. 약한 자, 무능한 자, 부족한 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여겨질 수 있는 인생의 마이너리티가 당당히 대역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말씀이 떠오릅니다.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이사야 60:22)” 조건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집념’이 대역전 드라마를 만듭니다. 인생은 끝내기 홈련도 허용되는 야구와도 같은 것입니다. 사랑과 감사로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435 “티핑 포인트-발화점” (2013년9월29일) 파일
GMC
4364 2013-09-28
Normal 0 0 2 false false false EN-US JA X-NONE <style> /* Style Definitions */ table.MsoNormalTable {mso-style-name:"Table Normal"; mso-tstyle-rowband-size:0; mso-tstyle-colband-size:0; mso-style-noshow:yes; mso-style-priority:99; mso-style-parent:""; mso-padding-alt:0in 5.4pt 0in 5.4pt; mso-para-margin:0in; mso-para-margin-bottom:.0001pt; mso-pagination:widow-orphan; font-size:12.0pt; font-family:"Cambria","serif"; mso-ascii-font-family:Cambria; mso-ascii-theme-font:minor-latin; mso-hansi-font-family:Cambria; mso-hansi-theme-font:minor-latin; mso-fareast-language:EN-US;} </style> “티핑 포인트-발화점” <말콤 그래드웰>이 지은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라는 책이 있습니다. 티핑 포인트란 어떤 것이 균형을 깨고 한순간에 전파되는 극적인 순간을 뜻합니다. <티핑 포인트>는 마케팅 용어로서 성냥개비가 일정한 온도로 상승될 때 불이 점화되기 시작하는 ‘발화점’을 가리키는 말에서 기원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망해가던 <허시파피>라는 회사의 신발을 뉴욕의 몇몇 히피족들이 신고 다니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미국의 백화점을 휩쓸었던 현상을 들 수 있습니다. 처음 인기도 별로 없었던 <조앤 롤링>이라는 무명의 동화작가가 쓴 <해리포터>라는 소설이 어느 순간 갑자기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미미하게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탁’하고 터지는 극점이 있는데, 이 순간을 가리켜서 <티핑 포인트>라고 합니다. 유행이라는 것도 알고보면 <티핑 포인트>를 넘어설 때 만들어지는 현상입니다. 처음에는 미미하게 보이며,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티핑 포인트>를 넘어서면서 급격한 변화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아이디어나 제품, 메시지, 행동의 전파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진행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도 <티핑 포인트>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꿈꾸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실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며 절규하시는 예수님을 실패한 영적 리더의 외마디 비명으로 여겼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진정한 발화점이요 <티핑 포인트>였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티핑 포인트>를 분별할 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야 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은 섭씨 100도가 되어야 비로소 부글부글 끓습니다. 이 온도까지 물이 상승되지 않으면 물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증기기관인 터빈을 돌리려면 섭씨 100도를 반드시 만들어야만 됩니다. 이 지점이 바로 <티핑 포인트>입니다. 물이 끓지 않는다고 안달하다가 일찌감치 포기해 버리면 끓는 물이 만들어 내는 힘을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영적 분별력은 큰 결과를 만들어내는 영적 발화점인 <티핑 포인트>를 분별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종인 엘리야는 3년6개월 동안 비 한방울 떨어지지 않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갈멜산 정상에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끼고 드렸다는 기도는 그의 심정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잘 표현하는 대목입니다. 일곱번이나 지극 정성으로 드려지는 엘리야의 기도… 그때 바다에서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남을 엘리야는 봅니다. 엘리야는 이 시점을 <티핑 포인트>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선포합니다. “왕이시여, 폭우에 막히지 않도록 마차를 타고 내려 가소서” 이 선포와 더불어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며 하늘이 캄캄하여지면서 큰 비가 쏟아져 내립니다. 

 문제는 영적 발화점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인내심 결여입니다. 인내하지 못하는 자는 <티핑 포인트>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비록 불경기 또는 불황의 늪에 빠져든다 할지라도 영적인 눈을 열고 믿음의 발화점인 <티핑 포인트>에 주목합시다. 그리고 인내와 더불어 하나님이 만드시는 엄청난 역사를 드러내는 인생이 됩시다. 큰 일을 이루시는 능력의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사랑과 감사로
 목회실에서 김지성목사 드림
434 “어머니의 회초리” (2013년9월22일) 파일
GMC
7109 2013-09-20
Normal 0 0 2 false false false EN-US KO X-NONE <style> /* Style Definitions */ table.MsoNormalTable {mso-style-name:"Table Normal"; mso-tstyle-rowband-size:0; mso-tstyle-colband-size:0; mso-style-noshow:yes; mso-style-priority:99; mso-style-parent:""; mso-padding-alt:0in 5.4pt 0in 5.4pt; mso-para-margin:0in; mso-para-margin-bottom:.0001pt; mso-pagination:widow-orphan; font-size:10.0pt; mso-bidi-font-size:11.0pt; font-family:"맑은 고딕"; mso-ascii-font-family:"맑은 고딕"; mso-ascii-theme-font:minor-latin; mso-fareast-font-family:"맑은 고딕"; mso-fareast-theme-font:minor-fareast; mso-hansi-font-family:"맑은 고딕"; mso-hansi-theme-font:minor-latin; mso-font-kerning:1.0pt;} </style> “어머니의 회초리”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님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머님으로부터 회초리를 많이 맞으며 자라난 편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심장 질환으로 늘 힘없는 모습을 보이셨지만, 매질을 하실 때 그분의 손끝은 매우 매서웠습니다. 자녀를 향한 따스한 사랑은 다른 어머니들과 별반 다름이 없었지만, 일단 잘못된 행동이라는 판단이 내려지는 순간 어머니의 회초리 세례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습니다. 어머니를 너무도 존경했지만 가혹한 회초리 징계는 제 마음 한구석의 큰 불만으로 커져만 갔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왜 우리 엄마는 잘못만 하면 이리 무섭게 매질을 하실까? 친구들 엄마는 자상하기 이를 데 없는데… 정말 친구들이 부럽다.” 분명 친구들 엄마는 우리 엄마와는 너무도 다를 것이라는 근거없는 생각으로 회초리질 하시는 우리 어머니를 향한 불만으로 꽁했던 것이 저의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나 나이들고 철들어 보니 가장 그리운 것 중의 하나가 어머니의 회초리입니다. 어머니의 회초리는 사랑이었습니다. 자식을 향한 강한 기대감의 표현이었습니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강력한 모성애의 결정체였습니다. 소천하신지가 십년이 넘어가는데 어머니를 그리워할 때마다 그분의 손에 들렸던 회초리가 함께 그립습니다. 어머니의 회초리는 ‘분노’나 ‘쓴뿌리’의 표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장 질환으로 피를 토하며 약하게 떨리는 손으로 종아리를 쳐댄 어머니의 마음 속에는 세상 누구도 품지 못하는 자식에 대한 강한 모성애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사랑을 헤아리지 못하면 매서운 그 회초리의 뜻도 결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저도 이제 아버지가 되어 회초리를 손에 듭니다. 그 회초리로 갸날픈 자식의 종아리를 치는 것이 죽기보다 싫은 짓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식에게 가하는 회초리질은 언제나 눈물이 되어 가슴 깊은 곳에 쌓여만 갑니다. 회초리가 제 아이들의 종아리를 칠 때마다 저의 어머니의 회초리도 함께 제 종아리를 내려칩니다. 사랑, 긍휼, 포기할 수 없는 기대… 어머니의 회초리는 바로 그것이었음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목회는 부모의 마음이 아니면 결코 감당될 수 없는 것임을 발견하고 또 발견합니다. 목회자로 부르심 받는 그 순간부터 그 부모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부어주셨나 봅니다. 제 자녀에게 품을 수 밖에 없는 똑 같은 심정을 교우들을 대할 때마다 경험합니다. 사랑,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기대감, 때때로 제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불쌍한 마음… 앞날이 더 잘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은 신앙의 불안정 또는 부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대하면서 아픔이 됩니다. “이래서는 결코 안되는데…”라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어쩌다 표현된 지적이나 충고가 예리한 회초리가 되어 여러분의 가슴을 내리치면 그때 이렇게 생각해 주십시오. “김목사가 나를 무척이나 사랑하나보다…” 아니 그렇게까지 생각하기 어렵다면 “김목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사랑을 드러내고 계시는구나”라고. 회초리를 맞는 것이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먼 훗날 그것은 그리움이요 애절함으로 다시금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 다시 찾아올 날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사랑과 감사로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433 “키워드는 ‘변화’” (2013년9월15일) 파일
GMC
3309 2013-09-13
Normal 0 0 2 false false false EN-US KO X-NONE <style> /* Style Definitions */ table.MsoNormalTable {mso-style-name:"Table Normal"; mso-tstyle-rowband-size:0; mso-tstyle-colband-size:0; mso-style-noshow:yes; mso-style-priority:99; mso-style-parent:""; mso-padding-alt:0in 5.4pt 0in 5.4pt; mso-para-margin:0in; mso-para-margin-bottom:.0001pt; mso-pagination:widow-orphan; font-size:10.0pt; mso-bidi-font-size:11.0pt; font-family:"맑은 고딕"; mso-ascii-font-family:"맑은 고딕"; mso-ascii-theme-font:minor-latin; mso-fareast-font-family:"맑은 고딕"; mso-fareast-theme-font:minor-fareast; mso-hansi-font-family:"맑은 고딕"; mso-hansi-theme-font:minor-latin; mso-font-kerning:1.0pt;} </style> “키워드는 ‘변화’”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19세기까지 세상은 느린 변화의 패턴을 보여왔습니다. 변화의 주기는 약 100년 정도였습니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렀을 때 변화의 속도는 빨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주기는 10년 주기로 바뀝니다. 20세기 후반 변화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변화의 주기는 5년으로 단축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21세기 초반 세상의 변화는 정신을 혼미케 할 정도로 빠르게 바뀝니다. 변화의 주기가 기껏해야 2년 혹은 1년 어떤 이는 6개월이 채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느덧 변화에 대한 수용 여부가 급기야 생존의 관건이 되는 순간이 찾아온 것 같습니다. 사진 필름 생산으로 세계적인 기업으로 군림했던 코닥은 ‘디지털 카메라’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 놓고서도 ‘아날로그 필름’만을 고집하다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휴대폰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핀란드의 ‘노키아’는 스마트폰의 대세를 외면하고 ‘피처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결과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사에 인수 합병되었습니다. 전자업계에서 철옹성 같은 1위를 고수했던 일본의 전자산업이 가히 비교도 되지 않던 한국, 대만, 중국등의 후발업체들에 의해서 몰락하고 있는 이유 또한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연구 보고서가 속속 발표되고 있습니다. 변화의 속도를 느끼지 못하고 변화에 무감각한 결과가 어떤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변화의 영역에 절대로 수용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질’과 ‘정신’입니다. 본질과 정신은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본질’과 ‘정신’이 변화한다면 그것은 ‘변화’가 아닌 ‘변질’일 뿐입니다. 이에 대한 변화의 수용을 협박 당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수용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그 외 것은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과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손해를 봅니다. 절호의 기회를 놓칩니다. 뒤쳐집니다. 한국 경제를 이끌고 있는 대기업의 회장이 ‘변화’를 주창하고 나서면서 그 기업은 2류기업에서 세계적 혁신기업이자 세계적 산업주도기업으로 그 위치를 바꾸었습니다. ‘변화’에 대한 그의 강렬한 메세지는 “자식과 아내를 빼고 다 빠꿔라” 였습니다. 한마디로 ‘본질과 정신’을 제외하곤 변화를 수용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세계적 일류기업은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입니다. 성경의 키워드는 ‘변화’입니다. 신앙은 세상과의 단절이 아닙니다. 건강한 신앙은 세상을 선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을 읽고 세상의 변화를 영적 변화로 승화시킬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제는 ‘세상’과 ‘선민’을 강하게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상을 피했습니다. 세상은 기피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로 편입의 대상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세상의 흐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하나님의 세계로 바꾸는 전략을 수립해야 합니다. 세상을 외면한 채 고립되어선 안됩니다. 절대로 변절과 변화를 혼돈하지 맙시다. ‘세상’과 ‘세속’을 헷갈려 하지 맙시다. 우리는 세상을 점령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야 할 사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사랑과 감사로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432 “헤어짐” (2013년9월8일)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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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44 2013-09-06
Normal 0 0 2 false false false EN-US KO X-NONE <style> /* Style Definitions */ table.MsoNormalTable {mso-style-name:"Table Normal"; mso-tstyle-rowband-size:0; mso-tstyle-colband-size:0; mso-style-noshow:yes; mso-style-priority:99; mso-style-parent:""; mso-padding-alt:0in 5.4pt 0in 5.4pt; mso-para-margin-top:0in; mso-para-margin-right:0in; mso-para-margin-bottom:10.0pt; mso-para-margin-left:0in; line-height:115%; mso-pagination:widow-orphan; font-size:11.0pt; font-family:"Calibri","sans-serif"; mso-ascii-font-family:Calibri; mso-ascii-theme-font:minor-latin; mso-hansi-font-family:Calibri; mso-hansi-theme-font:minor-latin;} </style> “헤어짐” 한국의 대표적 시인 김소월의 시 중 압권은 ‘진달래꽃’입니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이별의 아픔’을 서정적으로 표현하는 걸작 중의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읖조려보았을 그런 시입니다. 헤어짐의 아픔은 사랑과 비례합니다. 사랑의 깊이가 크면 클수록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절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떠나는 사람의 의지가 너무 크다면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라는 표현으로 아픈 심정을 역설적으로 감출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헤어짐의 아픔은 보내는 자와 떠나는 자 모두에게 있겠지만 ‘진달래꽃’을 낭송하다보면 ‘보내는 자’의 아픔이 훨씬 더 강렬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바위선교회의 김대평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별의 아픔을 토로하신 내용을 듣고 많이 공감을 하게되었습니다. “만남이 있으면 필연 헤어짐이 있지만 목회자에게 있어서 헤어짐은 언제나 큰 아픔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김목사님께서 목회하시면서 가장 힘든 일은 교우들을 떠나보내는 일이었다라고 회고하셨습니다. 그래서 김목사님께서는 새가족반을 마칠 무렵에는 꼭 이렇게 당부를 하셨답니다. “만약 수년내에 교회를 떠날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시면 차라리 지금 교회를 떠나십시오. 이별의 아픔을 저는 감당하기가 힘듭니다.” 이유없는 헤어짐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헤어짐에 이유를 붙이자면 오래 존재할 관계는 이 지구상에 단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동고동락할 부부관계’도 없을 것입니다. 평생을 막역한 사이로 지낼 수 있는 친구관계도, 위로와 격려의 동역자관계도, 미래를 꿈꾸는 동업관계도 결코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헤어짐에 굳이 이유를 붙이며 교회를 떠나는 교우들을 볼 때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은 모든 목회자들에게 경험되는 동변상련의 마음일 것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를 떠나며 ‘목사님께 잘 전해달라는 말’로 이별을 통보합니다. 통보받는 이별의 아픔은 고뇌입니다. 밤을 뜬눈으로 하얗게 지새울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각성제입니다. 섬김의 열정마저 부숴뜨리는 공포입니다. 수년간의 관계가 ‘한마디의 통보’로 결론될 수 있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떠남은 자유지만, 진정한 사랑의 관계 속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떠남에는 강한 억압과 자책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랑한다면 왜 떠나가야해”라고 절규조의 어떤 대중가요 가사가 생각납니다. 비탄조의 표현이지만 와닿는 말입니다. 헤어짐을 생각하기에 앞서 ‘관계의 의미’를 묵상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헤어짐을 위한 기도는 관계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간접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분명 헤어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안에서의 헤어짐에는 ‘인정과 축복’이 존재합니다. 헤어짐의 당위성이 인정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나홀로만의 당위성은 ‘일방적 명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뜻안에서의 헤어짐 역시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달래꽃의 아픔’은 결코 아닙니다. 목회를 하면서 깊은 바람은 이별을 해도 ‘진달래꽃’을 읖조리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석별의 정을 나누지만 ‘재회의 기쁨 그리고 ‘하나님의 기쁨’을 기대하는 이별다운 이별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감사로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431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면…” (2013년9월1일) 파일
GMC
3926 2013-08-30
Normal 0 0 2 false false false EN-US KO X-NONE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무엇이 깨질까요? 당연히 계란이 깨어지겠지요. ‘계란으로 바위치기’는 무모한 일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강함’ 앞에서 ‘연약함’을 대비시킴으로써 ‘연약함’은 결코 ‘강함’을 이길 수 없음을 완곡하게 표현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함’을 좋아합니다. 강할 때 무시 받지 않고, 강할 때 비로소 성공을 이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강해지기 위하여 힘을 키웁니다. ‘완력’ ‘학력’ ‘재력’ ‘체력’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자연계의 원리는 ‘약육강식’입니다. ‘약한 것’은 ‘강한 것’의 먹잇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연의 모습을 잘 살펴보면 ‘약육강식의 원리’는 항상 맞는 것이 아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약한 면으로 보자면 현미경 없인 볼 수 없는 미생물의 감염에 의하여 맹수의 제왕이라는 호랑이나, 사자가 넘어지기도 합니다. 몇마리 모기의 습격에 의해서 거대한 몸집을 가진 코끼리가 도망을 치기도 합니다. 학벌로 치자면 비교가 되지 않는 분이 자신보다 뛰어난 학력을 가진 무수한 사람들을 거느리고 사업을 펼쳐가기도 합니다. 역사는 ‘약육강식의 원리’가 절대적 원리가 아님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세계를 지배했던 바벨론, 앗시리아, 마게도니야, 로마제국, 오스만제국, 나치독일, 파시즘 이탈리아는 패망국가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침략하여 무너뜨리려 했던 약소국들 가운데 어떤 나라는 여전히 존재하며 건재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대표적 국가입니다. ‘강하기에 살아남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남기에 강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강함’을 추구하기에 앞서 ‘결론’부터 살펴보는 것은 현명한 일입니다. 진리의 보고인 성경은 ‘계란으로 바위를 부순 사건들’이 부지기수로 많았음을 증언합니다. 세계최강 이집트 최정예 전차부대가 비무장 이스라엘 백성들을 결코 이기지 못했습니다. 완벽한 전투체계를 갖춘 견고한 여리고성은 여호와의 법궤를 따라 침묵시위를 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서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완전 무장한 싸움의 달인인 거인 골리앗은 물맷돌 몇 개만을 들고 돌진하는 소년 다윗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민족 청소를 목적으로 하였던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 하만은 힘없는 여인 에스더의 기도 앞에서 무기력하게 넘어져 버렸습니다. ‘강함’은 완력, ‘학력’, ‘재력’, ‘체력’에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강함’은 ‘연약함’ 속에도 존재합니다. 너무도 우습게 보이는 ‘약함’이 ‘강함’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육체의 가시’로 약하여졌을 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강함’만이 강한 것이 아닙니다. ‘약함’에도 강력한 힘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약함’으로 인해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습니다. 약하다고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약함’이 ‘강함’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약함 속의 큰 능력을 인정해야 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고 꼭 계란이 깨지는 것은 아닙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더라도 바위가 깨어지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감사로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style> /* Style Definitions */ table.MsoNormalTable {mso-style-name:"Table Normal"; mso-tstyle-rowband-size:0; mso-tstyle-colband-size:0; mso-style-noshow:yes; mso-style-priority:99; mso-style-parent:""; mso-padding-alt:0in 5.4pt 0in 5.4pt; mso-para-margin:0in; mso-para-margin-bottom:.0001pt; mso-pagination:widow-orphan; font-size:10.0pt; mso-bidi-font-size:11.0pt; font-family:"맑은 고딕"; mso-ascii-font-family:"맑은 고딕"; mso-ascii-theme-font:minor-latin; mso-fareast-font-family:"맑은 고딕"; mso-fareast-theme-font:minor-fareast; mso-hansi-font-family:"맑은 고딕"; mso-hansi-theme-font:minor-latin; mso-font-kerning:1.0pt;} </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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