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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618 “과연 그저 버려진 곳에 불과할까요?”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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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017-04-21
“과연 그저 버려진 곳에 불과할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지역이 있습니다. ‘사해’가 그곳입니다. ‘사해’는 죽은 바다라는 뜻입니다. ‘사해’는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호수 입니다. 염분 농도가 너무 강해서 강가나 호숫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고기를 비롯한 많은 생명체들이 서식할 수 없는 곳입니다. 해수면보다 1309 피트(399미터)나 낮은 곳에 위치해 있는 관계로 한여름 낮 기온은 살인적인 더위로 맹위를 떨칩니다. 또한 강한 바람은 소금기를 날려 주변 지역을 계속 사막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관계로 사해지역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오랜 세월 버려진 땅에 불과했습니다. 일년 중 강수량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 중의 한 곳. 소금기를 묻힌 강한 바람의 영향으로 농작물 경작은 거의 불가능한 지역. 호수라 하나 세계에서 가장 염분 농도가 높은 관계로 사람에게 전혀 도움되는 것은 전무하다 여겨졌던 지역. 그곳이 바로 ‘사해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사해를 오래 전에 버렸습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사해 지역’은 이스라엘을 먹여 살리는 ‘보고(寶庫,Treasure Island)’입니다. 사해 지역은 오랫동안 축적된 자연 미네랄 덩어리라 할 수 있는 ‘사해 진흙’이 널려 있습니다. 이 ‘사해 진흙’은 질 좋은 의약용품과 화장품의 주원료가 되기에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사해 지역’은 세계 최고의 청정지역이라 알려져 있는 지중해에 비해서 대기 중 산소농도가 15%이상 많은 곳입니다. 그래서 각종 질병 호전에 탁월한 효과를 보입니다. 그렇기에 사해 지역 곳곳에 의료센터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사해’를 중심으로 리조트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유럽과 미국의 관광객들이 일년 내내 북새통을 이룰 만큼 이스라엘의 관광산업의 중심지가 된지 오래입니다. 특히 ‘사해’는 칼륨, 브롬과 공업용 광물질이 널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각종 엄청난 양의 화학물질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는 사해를 주목합니다. 이런 이유로 사해는 이스라엘의 먹거리입니다. 저주받은 곳이라 여겼지만, 사실 사해는 이스라엘을 위한 축복의 통로입니다. 별 것 아니라 무관심하게 여겨 질 수 있는 곳에 하나님의 숨겨진 축복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심지어 부끄럽게 여길 수 있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닌 ‘자랑스러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입니다. 겉모습만으로 본다면 ‘사해 지역’을 평가하자면 ‘저주 받은 땅’이 분명합니다. 풀 한 포기 찾을 수 없는 황량한 벌판의 연속. 뜨거운 태양 아래 증발하는 호수는 하얀 소금기를 여지 없이 드러낼 뿐 생명의 흔적을 매정하게 지워버리는 듯한 느낌을 줄 뿐입니다. 그 새 사막의 뜨거운 열풍이 귓가를 때린다면, 마음은 더욱 어지러워지고 어서 이 황량한 곳을 빨리 탈출하고 싶은 충동만이 남게 됩니다. 하지만 그 누군가에 의해서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사해’ 속에 담긴 의미를 찾고자 하는 연구는 시작되었을 것이고, 결국 ‘사해’ 속에 담긴 숨겨진 축복은 밝혀지고야 만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도 검증 한번 받지 않은 채 버려진 영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난, 또는 운명의 장난이라 정의하며 애써 회피하고 무관심하게 여겨왔던 삶의 영역. 그것은 재정의 어려움일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건강의 상실일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복잡한 인간관계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에 ‘문제’라는 딱지를 붙여놓고 스스로 버림받은 영역으로 간주해 버리며 살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 ‘문제’의 진짜 민낯을 연구해 보면 어떨런지요? 의외로 그 회피해 버리고 싶은 문제의 영역이 ‘문제’가 아닌 진정한 ‘축복’일수도 있음을 발견하게 될지 모르잖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필요 없는 무가치한 것을 우리의 삶 중심에 허락하실 리가 없습니다. 검증해 봅시다. 버려진 채 방치된 우리의 삶의 영역을 말입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17 “예수님의 부활은 진리”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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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2017-04-14
“예수님의 부활은 진리” 16세기에 갈릴레오는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한 이후 인류는 둥근 지구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주 개발로 인해 지구 밖에서 지구 사진이 전송되면서 둥근 지구의 모습은 명확히 증명까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구는 편평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학의 문외한들이 아닙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편평한 지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편평한 지구 학회International Flat Earth Society)’를 만들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미국정부와 미항공우주국(NASA)의 ‘음모론’으로 다루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지구가 편평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수십 편의 학술적 논문을 매년 발표하고 있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류가 우주까지 그 영역을 확장한 시대에 ‘편평한 지구’를 학문적 영역으로 구축시키려 하는 ‘편평한 지구학’ 추종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그저 난감하기만 합니다.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 것을 “아니다”라고 애써 변명하려는 것처럼 구차한 모습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은 수백 명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후 베드로에게, 열두 제자에게, 그리고 한번에 오백 명이 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야고보에게, 그리고 바울 자신에게 나타나셨다고 언급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8). 자신이 그 편지를 쓰는 동안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대다수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밝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결정적 증거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헛것을 보았다라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너무도 그리워한 나머지 헛것을 본 것이란 말이 그것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부활은 조작된 음모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실제로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했을 뿐임으로 ‘부활’에 너무 깊은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입니다. 음모설 중 또 다른 내용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속임수를 썼다는 주장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서 빼어낸 후 부활했다고 거짓 소문을 내었다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사실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사실이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증거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위에 가장 강력한 증거는 세 개가 제시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활의 목격자들입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목격자는 수백 명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들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목격자들 대부분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며 생명을 걸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증거는 예수님의 부활 후 예수님을 따르고,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모습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던 믿음의 선배들은 그 분께 목숨을 걸었습니다. 삶의 방향을 예수님을 향해 과감히 전환시켰습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터뜨렸습니다. “오직 예수”가 인생의 지표와 목적이 되었습니다. 부활신앙은 진리입니다.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은 예수를 선택한 우리의 절대 가치임을 결코 잊지 맙시다. 2017년 부활의 아침에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16 “이제 차세대와 세상을 향해 곧게 뻗어 나가려 합니다”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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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2017-04-07
“이제 차세대와 세상을 향해 곧게 뻗어 나가려 합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사군자라 불렀습니다. ‘군자’란 완전한 인격을 가진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네가지 식물을 ‘군자’라 칭한 것은 고고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 속에 인생을 향한 교훈적 요소가 담겨 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중 대나무는 신비한 식물로 오랫동안 여겨왔습니다. 조선시대 시인이자 문신이었던 윤선도는 그의 시 ‘오우가’에서 대나무를 친구로 빗대어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식이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토마토가 과일이 아니듯, 대나무는 ‘나무’가 아닙니다. 식물학적으로 외떡잎 식물인 ‘풀’이라고 합니다. 나무 같지만 나무의 특성보다는 풀에 가까운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풀은 일반적으로 열매를 맺은 뒤 이파리와 줄기가 시들어 죽습니다. 그럼에도 대나무는 여러 해가 지나도 이파리와 줄기가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대나무는 이상한 신비를 갖춘 식물입니다. 종자를 심고 몇 년이 지나도 싹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몇년 동안 어린 대나무인 죽순이 돋기만을 기다리며 공들여도 좀처럼 움이 트지 않습니다. 길게는 7년이 넘게 움이 트지 않는 대나무도 있다고 합니다. 대나무는 보통 심은지 5년이 되는 해에 비로소 죽순이 돋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죽순이 나온 날로부터 석달이라는 짧은 시간에 그 크기가 무려 53피트(16미터)에서 82피트(25미터)까지 자랍니다. 용수철이 튀어오르는 것과 같은 경이적인 성장입니다. 정말 이상한 나무입니다. 구조적으로 살펴보면 이렇게 경이적인 성장을 하기엔 열악한 조건을 갖춘 식물입니다. 왜냐하면 대나무는 속이 거의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나무는 줄기의 속이 꽉 차있어 그 밑동이 굵어야만 가지를 뻗어내면서 하늘로 높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대나무의 줄기는 위로 뻗어 올라가기에는 턱없이 얇고, 속마저 부실합니다. 그런데 성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더군다나 곧은 성장을 합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이 대나무를 두고 하는 말인 듯 싶습니다. 대나무는 땅 속에서 놀고 있거나, 잠들어 있던 것이 아닙니다. 5년간 대나무는 땅속에서 섬유질의 뿌리 구조를 형성시키며 깊고 넓게 자신을 땅속으로 견고하게 확장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5년째 대나무는 땅속 줄기의 마디에 곁눈을 부풀려 전봇대처럼 솟아 오르는 것입니다. 다른 나무처럼 구조적 조건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속이 비어 있어 곧게 성장하기 어렵지만, 성장의 동력을 한순간도 아끼지 않습니다. 성장하는 것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동시에 비뚤어짐 없이 곧게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갑니다. 바람이 불면 대나무는 휘청거리도 합니다. 대형나무들이 견고하게 서있는 모습과 비교하자면 위태롭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저러다가 꺾여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조바심마저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그럼에도 대나무가 꺾이는 일은 없습니다. 엄청난 위력의 태풍이 불고 지나간 자리에 아름드리 고목나무가 뿌리채 뽑혀나가거나, 줄기자체가 꺽여버린 참담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대나무가 뽑혀나갔다거나, 줄기가 꺾였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무도 아닌 것이, 그저 나약하게만 보이는 것이 어찌 그리 강한 특성을 지녔는지… 그저 경이롭기만 합니다. 길게 대나무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대나무의 모습 속에서 교회 탄생 20주년을 맞이한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언뜻 볼 때 우리 교회는 그리 대단하게 보이지 않는 듯 싶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는 경이적인 성장을 이룬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조건을 따지자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교우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전형적인 보통 교회 모습 그 자체입니다. 떠오르는 교회들이 이룬 20년의 업적에 비하면 그간 무엇을 한 것일까라고 반문해 볼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지난 20년간 우리 교회는 무엇을 이루었는가라고 질문한다면 딱히 이것이다라고 말하기 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내면을 조금 깊숙이 들여다 보면 지난 20년의 결정체가 드러나 보입니다. 대나무가 땅속에서 그 기반을 튼튼히 세우는 일에 열심이었듯, 본질을 세우는 일에 20년을 할애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힘차게 내적 성장을 도모했습니다. 성경적 삶이라는 본질회복에 주력해 왔습니다. 본질회복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닮는 일로 가능하다는 철학으로 ‘훈련목회’를 지향해 왔고, 성도들은 삶의 변화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 왔습니다. 그 일만 20년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 결과 성경적 삶은 우리의 자녀 세대로, 그리고 교회 밖의 세대까지 확장시켜야 한다는 깊은 관심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대나무의 땅속 줄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깊은 성장을 이루었다가, 이제 땅 위로 그 줄기를 올려놓으면 죽순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교회탄생 20년 만에 우리 교회는 영적 죽순을 땅 위으로 드러냅니다. 스스로의 삶의 목적을 ‘본질’에 두었던 성도들이 성경적 삶을 자녀세대까지 연장시키고, 더 나아가 교회 밖 세대까지 확장시킬 목적으로 교회의 동력을 이제 땅 위로 올려 놓는다는 뜻입니다. 좋은 조건과 능력이 넘쳐나서 그리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장의 동력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20년 동안 줄기차게 확인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은 확인을 뛰어 넘어 확신이 된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이제 축적해 놓은 영적 동력을 지상으로 올려놓고, 하늘을 향해 높이 뻗어 오르려 합니다. 교회의 3대 비전 중 하나인 성경적 삶을 위한 본질회복비전 실현에 20년이 필요했었습니다. 이제 남은 두 비전 ‘차세대 비전’과 ‘선교비전’의 완성을 위한 첫출발이 교회 탄생 2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이 되는 것 같습니다. 향후 우리교회는 차세대(자녀 세대, 영어 세대, 젊은이 세대)를 세우는 일에 주력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의 능력과 성경적 삶의 가치를 전수할 것입니다. 방황하는 차세대를 교회로 흡수시키며 그들을 복음의 동력, 미래의 동력으로 전환시키는 일에 올인할 것입니다. 동시에 ‘선교적 교회’로 교회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낼 것입니다. 선교적 교회는 교회 밖에 교회를 세우는 일에 주력하는 사역전략을 말합니다. 선교적 교회는 사람을 향해 찾아가는 교회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한 영혼이라도 구원시키며 십자가의 용사를 만드는 일이라면 그 한 영혼을 위해서 교회를 세우는 일을 시도하겠다는 의지를 뜻합니다. 이제 LA동부지역에서 20년간 영적인 뿌리를 내린 우리 교회는 선교적 교회의 죽순을 땅위에 올립니다. 필요하다면 LA동부지역 밖에도 교회의 비전을 같이 하는 교회를 지속적으로 세워가는 ‘선교적 교회’로 그 역량을 극대화시키려 합니다. 땅 속에 뿌리를 내리는 일에 5년을 필요로 했던 대나무가, 비로소 죽순을 땅 위로 밀어 올리자 순식간에 수십미터의 줄기를 하늘로 뻗어 올리듯 우리 교회는 경이로운 모습의 교회로 거듭날 것입니다. 본질회복을 위해 20년을 필요로 했던 우리교회가 ‘차세대’와 ‘선교적 교회’로 출발하면 순식간에 시대와 세상을 점령하는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그 엄청난 역사의 자리에 지금 우리 모두는 서있습니다. 교회탄생 20주년 기념주일 아침에 감사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15 “삶의 단순화”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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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2017-03-31
“삶의 단순화” 그린란드는 북극점에 가장 가까운 빙하와 눈보라의 땅입니다. 겨울의 추위는 평균 섭씨 영하 30도(화씨 영하 22도)에 이른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섬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사는 지역은 해안가 몇 개의 도시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섬의 관광 피크는 한겨울이라 합니다. 세계 각처에서 한겨울에 그린란드로 몰려든다고 합니다. 보이는 것은 흰 눈과 빙하 그게 다입니다. 색깔로 치자면 ‘백색’ 하나 뿐입니다. 하지만 극한의 추위 속에서 바라보는 단순한 백색의 절경은 황홀함 그 자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린란드의 겨울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그다지 아름답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눈보라와 흰 눈. 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을씨년스럽고 춥게만 느껴질 뿐입니다. 그런데 왜 관광객들이 좋고도 좋은 곳 다 놔두고 한 겨울의 극지를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칭찬할까요? 그들은 ‘절제된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색깔은 없습니다. 흰색 하나입니다. 다른 색깔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극한의 절제입니다. 그런데 극한의 절제가 실제로는 강력한 아름다움이 되는 것입니다. 절제가 바로 단순화입니다. 단순화시킨다는 것은 무언가 부족하도록 만드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 단순화가 삶으로 이어지면 삶은 아름다움을 만들며, 때로 강함도 형성시키는 것입니다. 평생 건강하게 장수하는 사람들의 건강비결을 알고 보니 별 것 아닌 것 때문에 놀라웠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비싼 녹용, 산삼 같은 거 먹지도 않고, 그저 매일 소식하고, 하루 1시간 산보한 것 이외는 특별한 것 없다는 것입니다. 건강 비결은 삶을 단순화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생 병 한번 앓은 적 없이 100세가 넘도록 장수하시는 분들에게서 단순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영적인 거장들의 경건생활을 살펴보면 산속에서 소나무 뿌리 몇 개씩 뽑으면서 금식하고 기도원에서 매일 사는 것 아닌 듯 보입니다. 서양의 기독교는 아예 기도원조차 없습니다. 물론 리트릿센터 같은 곳은 있지만 한국식 기도원의 개념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실제로 경건한 모습의 삶을 이루었던 영성의 거장들은 한국보다 여전히 서양이 우세합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삶의 단순화(심플라이프)가 아닐까 합니다. 영성가인 리차드 포스터는 경건의 힘은 ‘심플라이프’에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비록 강력한 기도, 체험, 뜨거움이 있다 할지라도 ‘삶의 단순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얼마 못가 깊은 침체를 경험하게 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분명히 영적인 노력이 강력하게 이루어짐에도 늘 마음은 편하지 않고 헉헉거리는 경건생활의 모습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복잡한 생각’ ‘복잡한 삶의 모습’이 그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족하는 마음’이 경건의 큰 유익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단순화입니다. 성경은 강조합니다. “소유를 단순화시키라. 태어날 때 빈 몸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죽을 때 빈 몸으로 떠난다.” 하나라도 더 소유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생활을 청산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는 물질의 악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렇게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표현하려는 핵심은 ‘단순화’를 의미합니다. 단순화에 실패하면 어떤 결과가 만들어질까요?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디모데전서 6:9)” 성경은 단순화에 실패할 때 경험되는 여러가지 폐단을 지적합니다. 시험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또 올무에 스스로 걸려들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외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이 잘 생기게 되어 결국 파멸과 멸망을 자초하는 일이 생김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복잡한 체계를 단순화하는 작업이 결국 경건의 모습을 잘 유지하는 지름길이 되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아름답고, 강한 신앙은 버릴 것은 버리고, 정리할 것은 정리하는 삶의 단순화로 가능함을 잊지 맙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삶의 단순화를 시도해 봄은 어떨까요?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14 “다시 꿈을 꿉니다”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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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2017-03-24
“다시 꿈을 꿉니다” 평생을 감당할 목회이기에 꼭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조직체(Organization)가 아닌 생명체(Organism)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신학교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내용이 바로 교회는 생명체라는 말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세워진 것이 교회였고, 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기관(Institute)이라고 불리는 많은 단체와는 달리 교회는 재정, 정관, 조직이 중심이 아닌 생명이 중심이라는 사실을 꼭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일체의 외부 도움을 정중히 거절한 가운데, 저희 집 거실에서 무작정 예배를 드림으로 우리 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현대 교회가 자립하고 성장하려면 다섯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잘 준비된 일정한 수의 개척멤버, 실력 있는 교역자 진용, 탄탄한 재정, 모임을 가질 수 있는 건물, 성도들의 신앙을 잘 세워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다섯가지 요소를 지닌 교회는 시작과 더불어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다고 합니다. 그러나 애초부터 그런 요소가 우리교회에는 전혀 없었습니다. 어쩌면 무모하기까지 여길 수 있는 교회의 시작이 가능했던 것은 ‘교회는 생명체’라는 대전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명의 탄생은 재정, 조직, 프로그램과 같은 외적인 요소 때문이 아닙니다. 생명의 탄생은 신비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생명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며, 보존하시기에 그 생명은 성장하고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생명체이기에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곧 맞이하게 될 우리교회의 탄생 20주년을 앞두고 ‘교회는 생명체’라는 대전제를 다시금 저에게 확신시켜 주십니다. 20년간 크고 작은 수많은 일들이 교회 위에 있었습니다. 한 그루의 푸른 소나무가 겉보기에는 보기 좋은 모습을 하고 있는 듯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세월의 풍상을 견디어낸 흔적들을 갖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목사님, 열이면 열 다 다른 교우들을 어떻게 감당하세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저를 측은히 여기는 듯 물어오는 교우들의 질문 앞에서는 늘 깊은 상념에 잠길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을 뿐입니다”라는 뻔한 모범답안을 제시하지만, 사실 그것은 저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토해내는 저의 진솔한 답변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십니다. 우리 교회의 목회를 통해서 그 사실을 배웠습니다. 아무 것도 없다 할지라도 꿈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꾼 꿈은 망상이나 공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한사람의 꿈을 현실화시킵니다. 꿈이 실현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이지,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꿈을 꿉니다. 교회가 진정한 생명체임을 확인 받았기에, 우리 교회를 통해서 온 세상에 영향을 행사하는 그 멋있는 꿈을 말입니다. 지역교회의 핵심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몇 명이냐 보다 어떤 사람이냐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 중요한 원리를 20년간의 목회를 통해서 배우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어느 곳이나 넘쳐납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의 뜻을 받들어 일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마태복음 9:37, 38)”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모여야 할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를 교회탄생 20주년을 맞이하며 다시금 꿈꾸어 봅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13 “슬림화 전략”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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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2017-03-17
“슬림화 전략” 장거리 그리고 장기간 여행을 하는 사람일수록 가방의 무게는 늘어납니다. 여행하면서 입을 옷과 여러가지 용품들을 가방에 집어넣다보면 가방은 한도 끝도 없이 채워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행객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여행에서 생명줄처럼 여기게 되는 이 가방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여행 중 가장 큰 장애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들의 가방은 놀라우리만큼 슬림합니다. 집을 떠나 타지에서 몇개월 이상 체류할 사람이 달랑 손가방 하나에 배낭 하나 메고 항공기에 탑승하는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때론 꼭 필요할 것이라 생각해서 챙겨넣은 물건이 여행 중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이 그대로 집으로 돌아올 때도 있습니다. 트레블 메가진에 따르면 여행자들은 자신이 짐속에 챙겨넣은 물품의 반 정도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손도 대보지 않은채 집으로 고스란히 가져온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하나라도 더 챙길 것이 없는지를 고민합니다. 로알 아문센은 1911년 12월19일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했던 노르웨이의 탐험가입니다. 극한의 추위와 싸워야 하는 남극탐험은 목숨을 걸어야 가능한 탐험 중의 탐험이었습니다. 아문센은 남극점 탐험에 경쟁을 벌였던 영국의 탐험가 로버트 스콧이 당시 최첨단의 탐험장비를 가지고도 실패한 남극점 탐험을 끝내 성공시키고야 말았습니다. 전문가들은 아문센의 남극점 탐험 성공의 결정적 이유를 ‘슬림화 전략’에서 찾고 있습니다. 아문센은 탐험 도중 아무리 귀한 물건이라 해도 탐험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물건은 무조건 버렸습니다. 일상생활과 탐험은 가치관이 달라야 한다는 신념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행자나 탐험가나 여정에서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짐을 챙깁니다. 짐이 여정을 편안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그리합니다. 그러나 그 짐이 여정을 힘들게 만드는 결정적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삶이 여행이나 탐험같은 여정으로 많이 묘사됩니다. 그래서 가능한 인생의 여정을 편안하게 이루고 싶은 생각에 우리는 많은 것을 챙깁니다. 우리가 챙기는 것들이 인생을 좀더 우아하고 편리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확신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생 여정을 힘들게 만들거나 실패하도록 만드는 주범이 우리가 챙겼던 바로 그것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한참 후에 깨닫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인생의 짐을 얼만큼 가볍게 만드는가도 성패여부의 한몫을 거듭니다. 그래서 ‘챙기는 훈련’보다 ‘버리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챙기는 훈련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실제로 필요한 것은 ‘버리는 훈련’ 인데 말입니다. ‘버리는 훈련’이 안되면 인생의 목표점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것만이 눈에 들어옵니다. 결국 짐을 챙기다가 정작 목표점에는 도달해 보지 못하는 불행한 결과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살다보니 버릴 줄 안다는 것은 달인의 경지에 올라야만 가능함을 깨닫게 됩니다. 스승과도 같은 어떤 목회자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예전에는 얻기를 구하는 기도가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버릴 수 있는 용기를 구하는 기도가 나의 기도가 되고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슬림화 전략’을 택합니다. 버릴 수 있는한 버리는 그 슬림화 전략 말입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12 “대한민국의 연합을 위한 기도”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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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2017-03-10
“대한민국의 연합을 위한 기도” 조국에 대한 사모함이 이민자들의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비록 몸은 머나먼 미국땅에 살고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조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은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공통된 마음일 것입니다. 한국이 잘되면 뿌듯한 긍지가 생기며, 한국의 실정이 어려우면 뭔가 불편한 가슴앓이를 하게 됩니다. 애써 무심해지고자 해도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은 우리의 태생이 대한민국을 근본으로 하고 있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우리들이기에 한국의 대통령 파면 소식은 지난 주간 가장 뜨거운 소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작년 12월9일 국회에 의해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었고, 석 달 만에 헌법재판소에 의해 탄핵안이 인용(결정)됨으로써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헌법적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결정이지만 워낙 사안이 민감한지라 이에 대한 후유증이 만만치 않은 듯 보입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 이후에도 탄핵 찬성집회와 반대집회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며, 반대집회에서는 헌법재판관들에 대한 강력한 항의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 그 실례라 할 수 있습니다. 걱정은 대통령 파면 그 자체라기 보다 극도로 분열된 국론입니다. 이미 한국은 보수와 진보에 따른 정치적 양극화 현상이 상당히 가속화된 상황입니다. 사실 정치적 성향이나, 사상적 성향에 따라 보수냐 진보냐가 근원적 문제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갖는가는 개인의 자유이므로 문제 삼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극히 염려스러운 것은 정치적 성향의 차이로 인해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극단적 편가르기입니다. 극단적 편가르기는 결국 형제가 적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이래서 분열이 무서운 것입니다. 이미 한국은 정치적 성향의 극한 대립에 의해 헌법재판소가 어떤 판결을 내리더라도, 어느 쪽이든 간에 깊은 불만을 표출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존중하자 말하지만 막상 그리 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분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분열된 사회일수록 사안에 대한 수용은 무척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대한민국 헌정사의 초유의 사태보다 헌법재판소의 판결 이후에도 중단되지 않는 탄핵 찬성 또는 반대라는 명목의 집회가 더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역사는 인류를 불행하게 만든 주범 중 하나가 분열임을 증거합니다. 인류를 비참하게 만든 대부분의 전쟁은 분열에서 출발했습니다. 그 실례 중 하나가 바로 우리 조국입니다. 하나의 나라로서 한반도에 존재했던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됨으로 두개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수백만의 인명피해와 더불어 여전히 또 다른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극심한 대치상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민족 분단 이 후 70여년 동안 우리 민족은 결코 평안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여전히 이념과 사상에 의한 분열, 정치적 성향에 따른 분열, 지역 감정에 따른 분열, 세대적 갈등에 따른 분열의 연속선 상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 최대의 위기라 할 수 있는 대통령 탄핵에 따른 분열의 몸살을 앓고 있는 와중에 있습니다. 잘되는 비결은 연합입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 우수한 시스템, 차별화된 능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분열의 조짐이 있는 나라는 잘될 수 없습니다. 귀신을 내쫓으시는 예수님을 책잡으려 하는 측에서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 들렸다”라는 근거 없는 주장으로 비판을 가해왔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는 버틸 수 없다 (마가복음 3:23, 24)”라고 말씀하시면서 분열은 교활한 사탄도 경계하는 일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사탄조차 자신은 분열을 경계하면서 분열을 조장하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그렇기에 분열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열되지 않고 연합의 정신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이슈는 연합입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탄핵정국의 후유증을 툴툴 털어버리고 이미 결정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하며 연합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기 위해서는 먼 미국땅에서나마 조국을 사모하는 우리 이민자들이 하나님께 깊이 탄원해야 할 것입니다. 조국을 위해 기도합시다. 조국의 연합을 위한 간절한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어찌 흘려 보내시겠습니까?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11 “사랑의 힘”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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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2017-03-03
“사랑의 힘” 저의 어머님은 심장판막증이란 질병으로 고생을 하신 분이십니다. 저는 어머님이 심장문제로 늘 힘들어 하신 것을 보고 자란지라 세상의 어머니가 모두 우리 어머니 같은 줄 알았었습니다. 조그만 힘든 일을 하시면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하셨습니다. 심장판막증의 가장 큰 증상은 숨이 차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님의 걸음걸이는 늘 힘에 겨운 모습이었고, 조금이라도 무거운 것은 손에 들고 다니기에도 벅차하셨습니다. 이렇게 나약한 어머니셨지만 상상할 수 없는 강한 모습을 한번 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볼거리라는 병이 저를 찾아온 것입니다. 고열로 눈동자가 돌아가고 정신마저도 가물거렸던 어느 늦은 밤. 어머니는 저를 등에 업으시고 집 근처에 있던 동네 병원을 찾으셨습니다. 혼자서 걸으시는 것조차 버거워하셨던 어머니셨습니다. 서너 걸음 걸으시다 “후”하고 한숨을 거두어들이신 후 다시 힘겨운 발걸움을 옮기시는 것이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저를 등에 업으시고 동네 병원을 향해 뛰어가신 것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 병원문을 두드리시고 아들을 살려달라시던 어머님의 외침은 가물가물 거리는 희미한 정신 속에서도 분명히 들을 수 있는 소리였습니다. 그 어머니의 모습은 예닐곱 살 밖에 되지 않은 철부지였던 저의 마음 속에 분명한 확신을 안겨주었습니다. “우리 엄마가 나를 너무도 사랑하시는구나” 자신의 몸조차 가누기 어려운 순간에 아들을 업고 뛰시며, 소리칠 수 있었던 그 힘의 근원은 어디서 나온 힘일까? 생각해 보면 신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 인생의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지금에서야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힘’이었음을 말입니다. 사랑의 힘은 위대합니다. 불가능함을 가능으로 바꾸는 동력입니다. 나사로를 사랑하신 예수님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건져 올리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사랑이 그 원천입니다. 보리떡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에서 시작된 만찬은 5천명 이상을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채울 정도로 남는 결과를 이루었습니다. 길에서 혹 기진할까 염려하신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이 만든 기적이었습니다. 사랑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만듭니다. 사랑의 힘은 자원과 형편에 결코 제한 받지 않는 역사를 만듭니다. 어떤 이론을 동원해도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결과를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기적’이라는 결론을 짓게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으로 시작한 일은 기적으로 마무리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타락한 인간을 거룩한 의인으로 바꾸십니다. 검디 검은 석탄이 하얗고도 하얀 눈이 될 수 없듯, 죄성으로 가득 찬 인간이 의인으로 결코 바뀌어질 수 없는데… 마지막 숙명의 장소인 지옥에서 기쁨과 행복의 장소인 천국으로 그 위치를 바꿀 수 있는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운명을 영벌에서 영생으로 바꾼 것입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기적입니다. 사랑의 힘을 믿습니다. 사랑으로 시작한 일은 기적으로 종결됨을 믿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가치를 다시금 확신하게 됩니다. 살면서 사랑으로 살아가도록 합시다. 안되는 일도 기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기적이 됩니다. 예배, 교제, 섬김, 전도등 신앙의 모든 행위들의 밑바닥에 ‘사랑’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신앙의 결과는 기적 그 자체가 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에게 언제나 사랑의 마음을 주옵소서”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10 “자기부인”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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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2017-02-24
“자기부인” ‘거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부흥 운동가였던 요한 웨슬레가 1741년7월25일 영국 의 옥스포드 대학 교수 및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하면서 사용된 설교제목이었습니다. 재미있는 표현 입니다. 영어로 ‘The Almost Christian’입니다. ‘온전 한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리스도인에 근 접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그림이 그려 지는지요? ‘거의’라는 말은 ‘대체로’ ‘거반’이라는 뜻을 포함한 말입니다. 퍼센테이지로 치자면 100%는 아 니지만 근접한 90-99% 정도? 그렇다면 ‘거의 그리 스도인’은 정말 ‘그리스도인’일까요? “그리스도인 같 지 않은 그리스도인도 많은데 ‘거의 그리스도인’이라면 괜찮은 거 아닙니까?” 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 니다. 그렇다면 만약 ‘빵’을 사려고 하는데 ‘거의 빵’이라고 하는 이름의 빵이 있다면 그것을 사 드실 용의는 있으신지요? 깊이 생각하도록 만드는 표현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누가 드러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 인가를 살펴보면 됩니다. 예수님은 신앙인의 선명한 기준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지독하게 싫어하셨습니다. 아픈 사람을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신 후 자신의 인기가 상승하면 자신을 숨기려 하셨습 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능력을 흠모해 임금으로 추대하려 하는 군중들을 피해 다니셨습니다. 인기를 구하 고, 자기 PR이 대세인 오늘날의 흐름과는 정 딴판의 행보를 이루셨습니다. 왜 그리하셨을까요? 드러냄의 대상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드러내길 원하셨던 대상은 오직 하나님 뿐이셨습니다. 예수님의 평가에 따르면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는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인 물됨을 이리 높이 평가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성경을 묵상해 보면 그 해답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넓히기 위해 태어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 이전, 오실 메시야를 세상에 소개하기 위한 사명을 안고 태어난 자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오직 드러내야 할 유일한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심에 대한 강력한 표현입니다. 세례 요한의 이 고백을 통해 그의 삶의 원칙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가 그리스 도인의 평생 슬로건입니다. 이런 삶의 방식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부인’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역설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이 필요한 이유는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입니다. 사람은 자기중심적 성향이 본성이 되기에 의지적으로 자기부인을 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초점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델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체중 감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그림을 보면 마른 사람이 아니라 통통한 사람이 미녀였습니다. 유사 이래 항상 통통하고 후덕하게 생긴 사람을 미인으로 여겼 는데, 모델이라는 직업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부터 마른 사람이 미인으로 그 관점이 바뀌었습니다. 후덕한 사람이 옷을 입으면 옷은 안 보이고 사람이 보이지만 대체로 마른 사람이 옷을 입으면 옷이 두드러진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마른 사람이 입어야만 디자이너의 옷이 100% 이상 살아난다는 한가지 이유에서 모델에 대한 선호가 마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직업적인 모델들이 디자이너의 옷을 잘 보여 주기 위해서 감량하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자신을 감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감량은 ‘자기부인’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나 보이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부인해야만 합니다. 내가 나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만 드러내는 통로가 될 때 신앙생활이 행복해 집니다. 신앙은 역설입니다. 그 중 하나가 자신을 부인하는 일입니다. 인생사 나를 드러내는 재미를 제외하면 삶 자체가 재미없을 것 같은데, 놀랍게 도 그 재미를 포기하면 신앙은 진짜 재미있어집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신앙의 진수는 자기부인으로 시작되 기 때문입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09 “성경 앞으로”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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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2017-02-17
“성경 앞으로”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역설했습니다.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는 “지식과 정보를 가진 자가 힘을 얻는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말은 역사를 통해서 어느 정도 증명이 되었습니다. 근대화, 현대화 과정에서 지식과 정보를 독점한 사람 또는 단체가 권력을 잡은 예가 많습니다. 독재자가 그 권력을 연장시키는 방법 중 하나가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한 통제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방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식과 정보를 접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온 것이 아닐까요? 인터넷은 가히 지식과 정보를 품은 무한대의 바다라 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는 인터넷의 모든 정보 검색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컴퓨터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컴퓨터의 발전은 스마트폰으로 이어집니다. 스마트폰은 손안의 컴퓨터가 되어 필요한 정보검색을 더 쉽고 편리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인터넷과 컴퓨터가 연결되며 인공지능까지 탄생합니다. 앞으로 인류가 축적해 놓은 엄청난 지식과 정보는 인공지능이 장착된 스마트폰 속으로 속속들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컴퓨터, 인터넷, 인공지능으로 이어지는 IT의 눈부신 발전으로 힘의 근원이라 하는 지식과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특정인 또는 특정 단체에 의해 독점되었던 지식과 정보는 누구라도 차지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역사 이래로 이렇게 지식과 정보를 이렇게 쉽게 접할 수 있던 시대가 오늘날 말고 있었을까요? 힘의 끝은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은 창조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된 모든 것은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았을 정도니 얼마나 그 아름다움이 어떠했을까는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식과 정보의 힘은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을까요? 분명 지식과 정보는 힘인 듯 느껴짐에도 아름다움을 이룬다고 선뜻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지식과 정보가 지배하는 현실은 오히려 혼돈과 불확실만이 더욱 가중되고 있음을 어느 누구나 피부로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요? 알아야 할 영역을 지식과 정보만으로 한정시켰기에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요? 여기서 ‘지혜’에 대한 깊은 접근이 필요함을 강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역사를 잘 살펴보면 인류의 발전은 지식과 정보만이 아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한 힘을 통제했던 더 큰 힘이 존재했었습니다. 그 힘이 바로 ‘지혜’입니다. 애굽과 바벨론은 축적된 지식과 정보의 산실이었습니다. 그 지식과 정보로 세상을 통치한다고 여겨졌던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지혜로 애굽의 모든 힘을 통제했습니다. 다니엘도 지혜로 바벨론의 힘을 통제했습니다. 지혜는 지식과 정보에 대해 우위를 점합니다. 지식과 정보의 힘만으로는 안됩니다. 지식과 정보만으로는 힘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아는 것이 많다고 똑똑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아는 것 많고, 정보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 미련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 참 많습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대화를 나눠보면 쉽게 구별됩니다. 진정한 힘은 지혜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지식과 정보는 편안한 삶을 이루도록 만들어줄지는 몰라도, 평안한 삶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힘은 평안을 누리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평안은 지혜로운 자의 몫 입니다. “지혜를 찾는 사람은 복이 있고, 명철을 얻는 사람은 복이 있다. 참으로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황금을 얻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 지혜는 진주보다 더 값지고, 네가 갖고 싶어하는 그 어떤 것도 이것과 비교할 수 없다 (잠언 3:13-15)” 성경은 지혜의 가치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담았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습득할 수 있는 지름길은 성경을 펼치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지식과 정보가 힘을 가져다 준다고 믿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은 성경에서 눈을 떼지 않습니다. 지식과 정보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지혜를 습득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은 지식과 정보로 승부를 보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혜’로 정면승부 합시다. 성경을 펼칩시다. 지혜가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08 “열매 맺기”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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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2017-02-10
“열매 맺기” 사람은 성공을 추구합니다. 성공의 키워드는 ‘큰 것’입니다. ‘크다’라는 의미를 가진 ‘대형’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가면 성공을 이룬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대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것’에 열광합니다. 대기업, 대형 쇼핑몰, 대규모 식당, 대형 건물… 심지어 교회도 대형교회를 성공한 교회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크다고 다 성공한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100년 전 성공기업으로 칭송 받았던 성공 기업의 92%는 현재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100년 전 대형교회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교회는 5% 이하라고 합니다. 진정 성공했다면 그 존재감은 결코 사라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며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명선언문입니다. 예수님은 평생 동안 살았던 지역이 반경 30마일 이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가르치고, 치유하고, 설교하는데 온 생애를 바치셨습니다. 일생을 30마일 이내에 사셨고,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12명의 제자들과 씨름하시다가, 그 중 한 제자의 배반으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나마 죽임을 당한 후 그 열두명의 제자들마저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예수님 당시 큰 영향을 행사했던 지도자들이 수두룩했고, 외형적 존재감을 과시했던 종교인들이 넘쳐났던 것을 감안한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초라하기 그지 없는 사역이 분명합니다. 만약 외형적으로 ‘큰 것’이 성공의 기준이라면 예수님은 분명 실패자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시간이 지날수록 전 세계에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가르침을 인생의 지표로 삼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실패자가 아닌 진정한 성공자임을 부인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대하면서, 성공은 ‘얼마나 넓은 지역에서, 얼마나 큰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에 달린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공은 열매가 기준입니다. 성경은 열매에 대해서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은 열매로 평가되어야 한다(마태복음 7:16)”는 지침까지 제시하셨습니다. 열매는 외형을 의미지는 않습니다. 열매는 품질을 뜻합니다. 저희 집 정원에 오렌지 나무가 있습니다. 이 오렌지 나무가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보통 오렌지의 대여섯배는 족히 될 수 있는 크기의 오렌지를 생산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초대형 오렌지의 맛은 정말 별로였습니다. “맛 좀 보세요”라고 자신 있게 내놓기가 쑥스러울 정도의 밋밋한 맛의 오렌지입니다. 그래서 한 점 맛본 후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좋은 열매를 말씀하셨다면 크기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좋은 맛을 뜻하시고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열매는 외관의 화려함이나, 크기를 뜻함이 아닙니다. 열매는 내면을 말합니다. 성경은 성공을 혐오하지 않습니다. 성공의 가치를 애써 깎아 내리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공을 위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단지 외적 규모에 치중한 성공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만약 성공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면 ‘열매’를 언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열매는 성공입니다. 과실 나무가 잘 자라서, 뿌리에서 흡수한 물과 풍부한 영양소를 가지에 공급하지 않았다면 결코 맺을 수 없는 것이 열매입니다. 그렇기에 열매는 성공의 결실입니다. 그러나 성공을 외형에서만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실수하는 것입니다. 과실 나무의 존재감은 열매에 있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설사 맺었다 할지라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했다면 그 과실 나무는 존재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매 맺지 않은 나무는 베어 땔감으로 사용할 뿐이다라는 극단적 표현까지 사용하신 것입니다. 성공의 기준은 ‘열매’입니다. 열매도 맺지 않은 상태에서 ‘성공여부’를 운운할 수는 없습니다. 좋은 것, 부족한 것을 평가할 수도 없습니다. 신앙은 열매 맺기를 목표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열매 없는 열정, 열매 없는 헌신, 열매 없는 성경공부는 다 무익할 뿐입니다. 열매는 외형에서 그 가치를 찾아서도 안됩니다. 열매의 핵심은 내면입니다. ‘내면이 아름다운 삶’을 이루어야 됩니다. 그 내면의 가치가 드러날 때까지 믿음의 경주를 쉬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07 “왜 기도인가?”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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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2017-02-03
“왜 기도인가?” 남보다 수면시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잠이 부족한 듯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불면증 환자도 아닌데도 연신 하품이 나며, 수면부족에서 나타나는 두통과 근육통, 그리고 무기력증이 그 증상입니다. 이런 증상의 원인 중 하나가 수면 시 무호흡이라고 합니다. 잠자는 동안에는 숨쉬는 통로인 기도가 좁아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숨을 쉬려 하기에 코골이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코를 골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며 숨을 쉬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꺼번에 숨을 몰아 쉽니다. 이것이 수면 중 무호흡증입니다. 수면 중 무호흡증은 만성피로에 시달리게 만드는 주범 중 하나라는 것이 현대의학의 설명입니다. 그러려니 하고 무심하게 방치하노라면 심근경색이나 뇌졸증 같은 심각한 결과를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수면 시 숨을 쉬지 못하는 무호흡에 대한 내용을 접하면서 ‘기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도에 대한 표현 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표현은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라는 말입니다. 수많은 설교와 책을 통해서 접해 온 말입니다. 호흡은 생명 유지의 기초입니다. “숨을 쉬어야지”라고 생각하든,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든 호흡은 이뤄져야 합니다. 만약 호흡하는 일에 문제가 생기면 생명은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입원한 환자의 이미지 1호는 산소 마스크를 쓴 모습입니다. 호흡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돕는 생명 유지 장치 중 가장 중요한 장치가 산소 마스크가 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제일 힘들어 하는 것은 호흡입니다. 그래서 산소 마스크를 씌웁니다. 그러나 임종 직후 그 산소 마스크가 제일 먼저 벗겨집니다. 호흡이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호흡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제1의 증거입니다. 결국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라고 표현한 것은 영적 건강의 지표가 기도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표현된 말이 분명합니다. 살아있는 인간이 호흡하지 않는다면 난센스라 말할 것입니다. 육체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호흡은 필수임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도 이상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고 무심히 다룹니다. 한 기독교 기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전체 그리스도인들의10% 정도 밖에 안된다라는 통계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가히 충격적입니다. 사람이 무호흡으로는 단 몇 분도 지탱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건만, 영혼의 호흡인 기도 없이 과연 신앙생활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의했다면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7)”고 명령합니다. 기도의 중요성을 잊지 말라는 완곡한 표현입니다. 영적 무호흡을 결코 방치해서는 안된다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기도는 영적 생명을 유지시키는 기본이요, 가장 중요한 영성적 행위임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2월부터 매월 기도카드를 발행합니다. 영혼의 호흡인 기도생활을 구체적으로 돕기 위한 취지에서 시작된 새로운 사역입니다. 주보에 첨부된 기도카드를 가지고 하루에 3분 이상 기도합시다.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라는 것 때문에 고민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기도카드에 제시된 기도제목이 기도를 도울 것입니다. 기도하다 보면 영혼이 활력을 얻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혹 기도 없는 신앙생활인지 조차 인식하지 못하였다면, 이 기도카드를 활용하여 기도의 자리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분명 영적인 건강이 찾아오고 있음을 강하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06 “바른 해석, 바른 이해”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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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2017-01-27
“바른 해석, 바른 이해” 2차 세계대전 말엽의 사건입니다. 1945년 7월26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 영국 총리 처칠, 중화민국 주석 장제스 등 연합국 수뇌들은 포츠담선언을 통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냅니다. 연합국 측의 항복 요구가 언론에 대서특필 되면서 일본 여론은 들끓었습니다. 정부의 자세를 밝히라는 요구는 점차 거세 졌고, 결국 당시 스즈키 칸타로 총리는 7월28일 오후 4시 기자회견을 갖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말실수를 하고 맙니다. "우리는 (포츠담선언)에 대해 '모쿠사츠' 할 따름입니다"라면서 '모쿠사츠'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모쿠사츠((もくさつ, mokusatsu)'라는 말은 영어나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서구 언어로 그 뜻을 표현할 수 있는 적당한 단어가 없습니다. 일본어 '모쿠사츠'는 '논평을 유보하다'에서부터 심지어 '거부하다'라는 의미까지 있습니다. 스즈키 총리는 '논평을 유보하다'는 뜻으로 '모쿠사츠'라는 용어를 쓴 것이었지만, 일본의 대외 선전 매체의 역할을 하던 도메이 통신이 영문기사에서 '모쿠사츠'를 '무시하다 (ignore)’로 옮기고 만 것입니다. 도메이 통신의 '무시하다'라는 표현은 연쇄반응을 일으켜 서방 언론에 '거부하다'라는 의미로 그 뜻이 바뀌고 맙니다. 이에 격분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사흘 뒤인 8월3일 원자폭탄 투하를 지시하는 문서에 서명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연합통신에서 기자생활을 하신 서옥식님은 ‘오역의 제국’이란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미국은 '무조건 항복' 요구를 거부한다는 답변에 경악했고 결국 8월6일 히로시마에 이어 8월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영어를 잘못 알아 듣는 바람에 총을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에 유학 중인 일본 학생이 늦잠을 자다가 학교에 지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워낙 급한 마음에 남의 집을 가로질러 학교를 가게 됩니다. 마침 이 지역을 순찰 중인 경관이 수상한 동양인의 행동을 보고 반복해서 경고했습니다. “Freeze! Freeze! (정지!)” 하지만 마음이 급한 일본 학생은 이를 “Please”로 잘못 알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경찰을 한번 쳐다보고는 길을 재촉했습니다. 결국 경관은 이 학생을 향해 총을 발사하게 되고 일본인 유학생은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나중 법정에서 이 사건의 참고인으로 출석한 대부분의 일본 유학생들은 ‘Freeze’와 ‘Please’의 발음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으며, 영어의 ‘Freeze’ 에 ‘정지’라는 뜻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처럼 잘못된 해석은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때론 불행한 결과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잘못 이해함으로 엉뚱한 결과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따라서 바른 해석과 바른 이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표본인 성경에 대한 접근도 ‘바른 해석’과 ‘바른 이해’를 전제로 삼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영적이라는 말입니다. 동시에 단어, 문장, 문법, 문맥(Context)으로 표현되는 ‘언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구조적, 논리적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석(주해)’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한 구절에 대해 어떤 해석을 내리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성경은 영적이기에 주석(성경 학자들의 연구에 의한 해설서)을 사용하는 것이 극히 인간적 방법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는 극히 무지하며 위험한 주장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배경과 단어의 원어적 의미, 문법적 의미 및 문맥을 살펴보는 것은 필수입니다. 성경이 영적이라 해서 신비로운 기운에 의지한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시기에 성령의 깊은 통찰을 의지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성령의 통찰이 ‘신비로운 감정’만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지혜의 영이십니다. 동시에 진리의 영이십니다. 따라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통찰은 감정을 뛰어넘고, 이성과 논리마저 조금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혼돈의 시대가 되니 어지러운 성경해석이 난무합니다. 바른 성경해석도 잘못된 것처럼 조장시키는 가르침이 너무 많습니다. 신학과 교리를 지극히 인간적인 것으로 평가절하시키기도 합니다. 성경 해석의 방법을 잘 익힌 후 갖는 개인 경건의 시간에까지 도전을 합니다. 바르게 설명해도 집중하지 못함으로 성경의 뜻을 ‘오해’하는 일들이 다반사입니다. 이런 혼돈의 시대에 성경에 대한 바른 훈련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배우더라도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그렇기에 이 시대는 신학적 균형을 갖춘 복음적 목회자로부터 성경을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어설프게 배운 성경지식이 풍성한 신앙생활을 방해합니다. 동시에 성경을 접할 때 한눈 팔지 않고 성경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끈기도 필요합니다. 이 한해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 바른 이해가 이루어지는 축복을 경험합시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05 “5감을 뛰어 넘는 6감의 삶”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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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2017-01-20
“5감을 뛰어 넘는 6감의 삶” 사람들은 ‘5감을 중요시 여깁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Fact)에 대한 인식은 ‘5감’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5감’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말합니다. 이게 문제가 생기면 사람은 사실에 대한 인식 부족이 생기기에 혼돈을 겪습니다. 그래서 오감은 중요하게 여길 수 밖에 없습니다. 얼마 전 깡통을 따다가 손가락에 제법 깊은 상처를 입어서 일곱 바늘을 꿰매었습니다. 그리고 상처가 아물어 실밥도 풀었는데 고민이 생겼습니다. 아물었지만, 상처 난 손가락의 감각이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만져봐도 그 부위로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의사는 천천히 감각이 돌아올 것이라 말하지만,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괜히 걱정이 됩니다. 사람들은 인식의 통로라 하는 감각 기관이 마비될 때 무척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5감’ 위에 한가지 감각기관이 더 있습니다. ‘영감’이라는 감각기관입니다. 이 감각 기관이 마비되거나 죽으면 기를 써도 영적인 세계를 접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세계만을 접할 뿐입니다. 야곱은 집을 떠났습니다. 혼자였습니다. 밤을 맞게 됩니다. 밤을 피할 수 있는 집 한 채 보이지 않았으니 유숙을 하게 됩니다. 들녘 한 복판에서 대충 잠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누우면 보이는 것은 깜깜한 하늘 뿐입니다. 적막한 들녘이라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 나뭇잎 움직이는 소리, 간간이 들리는 동물 울음소리가 귀를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하늘은 촘촘한 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전 같으면 낭만적으로 여겨질 수 있었겠지만, 철저히 외톨이가 된 자의 유숙은 회한의 눈물만이 있을 뿐입니다. 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리 저리 뒤척이다 겨우 눈을 붙일 수 밖에 없는 상황, 이것이 야곱의 현실이었습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마음을 정돈해도 이내 ‘홀로 된 자신’을 자각하면 냉랭한 현실만이 보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야곱은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됩니다. 잠들기 전에 야곱이 유숙했던 그 자리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황량한 들녘이 분명했습니다. 홀로 덩그러니 자리잡은 고독의 장소가 분명했습니다. 이리 저리 뒤척거리며 어렵사리 잠든 야곱에게 드러난 유숙의 장소는180도 달랐다.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닥다리가 서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사닥다리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땅으로 내려와 그 명령을 수행하는 천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분명 오감으로 느낀 현실은 ‘자기 혼자’, 그리고 황량한 벌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5감’으로만 바라본 현실과 영감으로 바라본 현실은 달라도 한참 달랐습니다. 혼자인 줄 알았는데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곳은 야곱을 위한 꿈의 도시가 천사들에 의해서 건설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표현을 지나칠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Surely the Lord is in this place, and I was not aware of it)” 야곱은 자신이 이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영감’으로 하는 것입니다. 만약 영감이 마비되면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을 결코 인식할 수 없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5감’으로 보게 현실과 ‘5감’을 뛰어 넘어 영감으로 바라보는 현실은 충분히 다를 수 있음을. 보인다고 다 똑같이 보는 게 아닙니다. 감각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현실을 읽어내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탁월한 ‘5감’의 능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영감’까지 사용하는 ‘6감’의 소유자를 당해낼 수는 없습니다. 영적 세계는 영적인 감각으로만 접할 수 있습니다. ‘영적 신비’는 ‘영’으로 풀어야 합니다. 신앙은 ‘5감’을 뛰어넘는 ‘영감’으로 다뤄져야 합니다. 신앙인은 ‘영적 안목’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영감이 샤프해지면 숨겨진 ‘진짜 현실’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영감’이 예민해 지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영감’으로 현실을 봅시다. ‘영감’으로 미래를 봅시다. ‘영감’으로 ‘꿈’을 가꿉시다. ‘영감’으로 인생의 승부를 겁시다. ‘영감’을 상실하면 ‘최선’을 놓칩니다. ‘영감’을 놓치면 ‘기회’를 놓칩니다. “주여, 우리를 탁월한 ‘영감’의 소유자가 되게 하옵소서.”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04 “4차 산업혁명에서 배운다”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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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2017-01-13
“4차 산업혁명에서 배운다” 인류문명을 획기적으로 바꾼 전환점이 산업혁명이었습니다. 산업혁명은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혁신과 더불어 일어난 사회와 경제적 구조변화를 뜻합니다. 그간 인류사에는 세 번에 걸친 산업혁명이 있었습니다. 18세기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증기기관이 발명됩니다. 증기기관 이 전만해도 동력의 중심에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증기기관이 화석연료를 머금고 달궈지면서 수백, 수천 마리의 말보다 강한 힘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후세는 증기기관을 통한 기계적 혁명을 ‘1차 산업혁명’이라 명명했습니다. 19세기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저장하고 활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전기가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대량생산을 이뤄낸 산업은 점차 분업화되고 체계화됩니다. 이를 ‘2차 산업혁명’이라 합니다. 20세기 후반에는 IT기술이 확산되고 이를 적용한 고도화된 자동화 단계로 접어들게 됩니다. 컴퓨터를 통한 자동화. ‘3차 산업혁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작년부터 ‘4차 산업혁명’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독일 태생의 경제학자인 ‘클라우스 슈밥’이 불을 지핀 화두입니다. 증기기관, 전기, 컴퓨터를 이을 산업혁명의 도구를 ‘융합(Convergence)’이라 표현했습니다. ‘융합’은 ‘통합’ 또는 ‘연결됨’을 뜻합니다. 과거에는 전화기는 통화를 위한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전화기는 통화 뿐 아니라, 생활의 모든 영역을 묶는 통합기기가 되었습니다. 이른바 ‘융합기기’가 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영역의 구분이 분명했습니다. 공학, 의학, 건축학 등등… 그러나 그 경계가 허물어져 가고 있습니다. 의학이 공학이 될 수도 있고, 공학이 건축학이 될 수도 있고, 건축학이 전산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전기제품을 생산하는 회사가 소프트웨어를, 소프트웨어 전문회사가 자동차를, 생활용품을 생산하는 회사가 의약품을 생산하는 회사로 영역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산업구조의 혁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클라우스 슈밥’이 ‘4차 산업혁명’에 대해 언급한 이후 주요 경제대국들은 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 독일, 일본, 중국은 산업구조를 ‘융합기술’로 전환시키는 정책을 작년부터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독자적인 산업은 존재할 수 없고, 모든 산업은 연결되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간 산업에 대해서도 원재료를 생산하는 1차 산업, 그것을 가공하는 2차 산업, 만들어진 제품을 판매하는 3차 산업으로 분류했지만, 이제 그 영역도 허물어져 가고 있습니다. 독자적인 산업 영역은 사라지고, 모든 산업의 영역은 빠른 속도로 통합되어 가고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을 접하면서 ‘홀로서기’는 존재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위 말하는 독불장군은 발붙일 곳이 더 이상 없는 시대가 되었음이 분명함을 느낍니다. 성경은 ‘함께 일함 (Working Together)’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우리 몸에다 각각 다른 여러 지체를 두셨습니다. 전체가 하나의 지체로 되어 있다고 하면,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실은 지체는 여럿이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고린도전서 12:18-20; 새번역)”. 성경은 은사를 설명하며 ‘융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융합’의 특징은 ‘연결 (Connecting)’입니다. ‘홀로 지체’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융합’에는 ‘모든 산업이 핵심산업’이라는 개념이 깔려 있습니다. 성경도 ‘핵심 지체’는 따로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라고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21; 새번역)” 4차 산업혁명이 가속화되는 시대에는 ‘내 비즈니스만이 최고’라는 고집을 부린다면 망하는 기업이 됩니다. 반대로 ‘변변치 못한 비즈니스’라는 사고도 망하는 사업체를 만드는 지름길이 됩니다. 협력과 상생의 정신이 투철한 기업일수록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색깔’이 강할수록 힘을 잃어버리는 교회생활이 됩니다. 역으로 ‘누군가가 하겠지’라는 수동적 사고도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교회생활이 됩니다. 행복한 교회생활은 ‘융합의 정신’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함께 일함’이 바로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융합의 정신이 아닐까요?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03 “패턴(Pattern)”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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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2017-01-06
“패턴(Pattern)” 패턴은 되풀이되는 현상이나 물체의 형태를 가리킵니다. 패턴의 핵심은 반복과 주기성입니다. 일정한 패턴은 조화를 만듭니다. 더 나아가 아름다움(미)을 이룹니다. 그렇기에 창조성은 패턴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옷은 몸을 보호하고, 가리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옷의 기능에 미적요소를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킨 명품옷들이 출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옷을 만들기 위해 견본을 만드는 작업을 ‘패턴’이라 합니다. 패턴작업이 잘된 옷은 보기에 무척 좋습니다. 과학은 패턴을 찾는 행위입니다. 기초과학은 사물을 관찰하여 일정한 패턴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패턴을 응용합니다. 패턴을 응용하여 더 편리한 사물을 창조해 내는 영역이 바로 응용과학입니다. ‘존 스노우’라는 의사는 수많은 런던시민들을 살상시킨 콜레라의 원인이 ‘물’에 있음을 밝혀내었습니다. 런던에서 콜레라로 사망한 사람들의 거주지를 지도로 작성하다보니 사망자 전부가 오염된 물 펌프 하나에게 물을 길어먹었다는 것을 뚜렷이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일정한 패턴을 통해서 콜레라균이 오염된 물에서 서식하게 됨을 밝혀냅니다. 그리고 콜레라 예방은 물을 끓여먹음으로써 가능함을 밝혀냅니다. 여기서 전염병의 원인을 밝혀내는 ‘역학(전염경로 조사)’이라는 영역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 역학 과정을 통해서 전염병 예방 방법들이 속속이 들어나게 되어 질병예방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패턴을 인식하게 되면 복잡한 일도 단순화됩니다. 가우스라는 사람은 0부터 100까지의 합이 5050임을 몇초만에 풀어냅니다. 그의 계산방식은 패턴을 이용한 방식이었습니다. 큰숫자 더하기 적은 숫자의 합은 100이 된다는 일정한 패턴을 그는 본 것입니다. 100 더하기 0은 100, 99 더하기 1은 100, 98 더하기 2도 100, 97 더하기 3도 100. 이런 식으로 100을 만든는 조합이 50개가 되고, 마지막에는 50이라는 숫자 하나만 남게 되므로 합은 5050이 됨을 감각적으로 본 것입니다. 패턴을 활용하면 최소의 노력으로 복잡한 문제까지 풀 수 있습니다. 진리는 결국 패턴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인공지능이 바둑의 고수들을 차례차례 무너뜨립니다. 바둑은 그 수가 무궁무진한 게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판단력, 순발력, 창의력을 기초로 합니다. 처음에는 인공지능이 어떻게 판단력, 순발력, 창의력을 발휘해야 하는 바둑을 둘 수 있겠는가라는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둑을 두는 인공지능(알파고)가 세계적인 바둑 고수들을 한명 한명 제치더니 현재까지 60전 전승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에게 바둑 두는 법을 어떻게 인식시켰을까요? 간단합니다. 프로그래머들은 인공지능에게 패턴 분석 능력을 부여시킨 것입니다. 바둑기사들은 바둑을 두지만, 인공지능인 알파고는 패턴을 분석합니다. 그리고 바둑에서 승리합니다. 모든 것에 일정한 현상이라 말할 수 있는 패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누린 축복과 영광의 뒤안길에도 패턴이 있습니다. 그 패턴을 분석해 보면 심플한 결과를 보게 됩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예배자의 자리’를 찾는 것을 소중히 여겼다는 일정한 패턴이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결국 ‘예배의 능력’을 경험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며, 예배자로서 살았던 그 패턴을 우리도 따르면 됩니다. 패턴을 알고 그 패턴을 따르면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복잡한 삶도 단순해집니다. 더 나아가 삶이 더 풍요로워집니다. 올 한해 믿음의 선배들이 만들어갔던 삶의 패턴을 주목해 봅시다. 그 패턴을 인식하고, 그 패턴 대로 따라가는 삶이 지혜로운 삶임을 잊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02 “물 때”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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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2016-12-30
“물 때” 넓은 바다를 가지고 있는 지구는 하루에 두번씩 썰물과 밀물 현상을 만들어 냅니다. 달과 지구의 자전에 의한 원심력이 그 이유라고 합니다. 썰물은 물이 빠져나가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밀물은 물이 다시 차오르는 현상입니다. 지역에 따라서 썰물과 밀물의 차이가 많이 발생하기도 하고, 적게 발생하기도 합니다. 썰물과 밀물의 차가 심한 곳은 캐나다의 뉴브런즈윅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썰물 이후 물이 차오르는 높이가 16미터나 된다고 합니다. 그 다음은 한국의 서해안에 위치한 인천지역인데 그 차이는 약 9.5미터 정도입니다. 이 지역은 물이 빠져나간 후 엄청난 면적의 갯벌들이 형성됩니다. 넓은 갯벌에서 조개등의 바닷 생물을 채취하다가 다시 물이 들어오면 육지로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가 됩니다.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밀물과 썰물에 예민해 합니다. 밀물과 썰물의 시간을 ‘물 때’라 하며 그 ‘물 때’를 늘 염두에 둡니다. ‘물 때’를 무시하면 잡을 고기도 놓치게 되고, 또 배가 갯벌에 갇혀 낭패를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부들은 ‘물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물 때’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입니다. 인생도 ‘물 때’와 같이 정해진 ‘시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항상 힘든 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힘든 때를 지나면 ‘즐거움’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동시에 항상 즐거운 때만 있는 것 또한 아닙니다. 그 시기를 지나면 고통의 때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인생에도 썰물과 밀물이 무한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통찰이 있는 사람은 썰물과 밀물의 ‘때’를 주목합니다. 썰물과 밀물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현상이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어부들은 배를 대는 곳 가까이 들어와 있는 바닷물을 가두어두려 하지 않습니다. 물이 빠져나가는 때가 언제인지를 찾습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썰물과 밀물 현상 그 자체가 아니라, ‘때’입니다. 사람들은 ‘때’보다 ‘현상’에 더 집착합니다. 그러나 현상은 ‘때’에 의해 좌우됩니다. 부유와 가난은 현상입니다. 항상 부유하기를 원하지만, 그 부유함은 우리 곁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평생 가난할 수는 없습니다. 살다 보면 희한하다 싶을 정도로 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늘 건강하게 살 수만은 없습니다. 살다 보면 감기에 걸려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그보다 더 심각한 질병에 갇힐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몸이 불편해지는 때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현상’보다 더 중시 여겨야 할 것은 ‘때’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때’를 예측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떤 현상의 때를 예측하는 일을 위하여 발달된 학문이 있습니다. 바로 ‘미래학’이라는 학문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과학, 인문등의 학문 전체를 기초로 삼아 앞으로 전개될 현상의 시기를 예측하려고 연구하는 신종 학문입니다. 어떤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그 시기가 언제인가를 예측해 볼 수만 있다면 세상은 더욱 편리해 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세워진 학문입니다. 미래학자들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이 있습니다. 바로 ‘통찰력’입니다. 통찰의 눈으로 ‘때’를 찾을 수 있다고 그들은 믿는 것입니다. 미래학자들이 공통적으로 표현하는 2017년의 전망은 어떤 것일까요? 미래학자들이 밝히는 2017년의 전망은 ‘혼돈 속의 혁신’입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는 이 시대상은 여전히 혼돈 그 자체지만, 그 속에서 이전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그 무엇인가가 만들어지는 한 해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사람만이 도약을 이룰 수 있을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미래학자들의 주장을 청취하다 보면 어떤 태도와 생각을 취하여야 할 것인가를 쉽게 판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2016년은 어제로서 우리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2017년이 만들 한해는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는 ‘때’를 인식해야 합니다. 밀물과 썰물의 시간이 있듯, 역사적 물 때가 한 해 속에는 담겨있습니다. 그 역사적 ‘물 때’가 보이는지요?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01 정신을 점검하는 성탄절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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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2016-12-18
“정신을 점검하는 성탄절”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칭기스칸은 항상 승리했습니다. 전광석화같이 빨랐기 때문입니다. 질풍노도와 같이 말을 달려 순식간에적을 궤멸시켰습니다. 빠르게 속도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몸이 가벼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럽기사단 갑옷과 전투무기의 무게는 70㎏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칭기스칸 쪽은 7㎏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유럽병사들은 철갑통으로 된 갑옷을 입었습니다. 또 긴 창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정면만을 향해 돌진해서 싸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풍은 당당하고 그럴싸했지만 둔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하지만 칭기스칸군은 얇은 철사로 된 스프링을 넣은 가벼운 옷을 입고 전투에 임했습니다. 당연히 날쌜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과 한 몸이 되어 자유자재로 움직여서 적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습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보였던 칭기스칸과 그의 군대가 아시아와 유럽을 제패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형식파괴'를 드는 역사학자들이 참 많습니다. 당시 각 나라들이 보유했던 군대들은 시각적으로 위압감을 보이게 하는 일에 치중했습니다. 철갑옷, 그위에 두르는 각종 휘황찬란한 망또, 화려한 치장…그래서 위압적인 군대의 이미지를 내려는데 많이 주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군장들은 막상 전투에서 거르적거리는 장애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그런 '형식'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Spirit)'이라는 점을 강조했고, 전투에 임하는 그의 군사들에게 날렵한 기동성을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와 유럽을 그의 제국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칭기스칸을 보면서 '형식'보다 '정신'에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느낍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역을 하시며 '정신'을 잃어버리고 형식에 치중하는 태도를 엄중 꾸짖으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 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태복음 9:13)" 유대인들은 제사 드리는 것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제사의 정신은 상실한지 오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사라는 형식보다도 정신이 중요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형식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그 형식 자체가 본질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부흥의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신'에 치중해야 합니다. 형식보다 정신을 세우는 일에 주력해야 합니다. 언제나 존재목적을 이해하며 그 존재목적 속으로 자신을 융합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름답게 세워지는 가정일수록 가정의 정신인 '가족애'를 함양하는 일에 더 많은 신경을 씁니다. 가족이 함께 모여서 가족예배를 드린다거나, 가족 기도회를 갖는등..믿음속에서 한가족의 사랑을 고취시키는 일과 같은 가족애의 정신을 세워가는 가정이 풍성해 집니다. 성탄의 계절입니다. 성탄의 계절에 그리스도인들이 다루어야 할 중요한 사항은 ‘십자가의 정신’ ‘복음의 정신’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요란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겸손하고 고요하게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만왕의 왕으로 오신 메시야의 탄생 장소는 마굿간이었습니다. 메시야 강림을 고대하던 사람들의 예상과는 사뭇 다른 장소와 분위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배경이 됩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요? 정신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메시야의 탄생 속에 담긴 ‘사랑과 은혜’를 드러내려함이 아닐까요? 성탄의계절이 갈수록 요란해지고 있습니다. 화려한 조명기구와 감미로운 캐롤송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왠지 마음을 들썩이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깊은 생각에서 절대 벗어나면 안됩니다. 분위기도 좋지만, 혹 깜박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정신’을 되찾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까맣게 잊어버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되집어 보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굳게 붙들어야 할 정신은 ‘사랑과 은혜’입니다. 정신줄을 놓지 않는 자만이 부흥의 결실을 누리게 됨을 잊지 말면서 말입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00 “허물을 덮는 사랑”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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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2016-12-09
“허물을 덮는 사랑” 결혼한지 십 년이 된 어느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는 남편에게 점점 더 불평과 불만이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각자 양철통을 한 개씩 가지고 다니면서, 서로에게 못 마땅한 일이 생길 때마다 그것을 글로 써서 통에 넣어두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 달 후, 양철통을 서로 교환하여 자신의 결점이 무엇인지, 상대방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했는지를 자연스럽게 알아보기로 한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이 목욕하고 타월을 목욕탕 바닥에 그대로 놓아둘 때, 더러운 양말을 빨래 통에 넣지 않고 아무 데나 놓은 채로 출근을 할 때, 치약을 아무 곳이나 꾹 눌러 사용할 때 등등 남편의 결점을 발견할 때마다 종이에 꼼꼼하게 적어 통에 넣어두었습니다. 한 달 후, 부부는 각자의 양철통을 들고 서로 마주보고 앉았습니다. "자, 당신이 한 달 내내 얼마나 나를 실망시켰는지 보세요." 아내는 퉁명스럽게 말을 건네며 양철통을 남편에게 내밀었습니다.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내의 통속에 들어 있는 쪽지들을 하나씩 꺼내어 읽었습니다. 이번에는 아내가 남편의 불평을 접할 차례입니다. 그런데, 남편의 통에서 나온 쪽지에는 모두 똑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남편은 아내의 결점을 발견할 때마다 그것을 사랑으로 극복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결점과 허물로 얼룩진 인생입니다. 결점과 허물이 많은 인생이기에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실망시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결점과 허물이 많은 우리들에게 ‘사랑’으로 접근해 오셨습니다. 사랑으로 우리의 결점과 허물을 극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저희를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희생제물로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의미하는 ‘성탄절’은 그래서 사랑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을 앞둔 대강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대강절에 꼭 묵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것입니다. 허물과 부족함을 뒤집어 쓴 우리를 사랑으로 감싸주신 그 운명의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듯, 우리의 삶의 스타일과 패턴도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사람을 사랑하여야겠다는 결심과 헌신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언젠가 읽어보며 가슴 따뜻했던 시 한편을 소개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나도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당신을 만들어가는 것뿐만 아니라 당신이 만들어가는 나의 모습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 다가가 매만져주는 것입니다 더 깊이 보고 따뜻하게 덥혀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내가 당신을, 당신이 나를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사랑은 서로를 닮게 만듭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귀기에 편한 당신의 나이와 부르기에 편한 당신의 이름과 다가가기에 좋은 당신의 온도와 함께하기에 좋은 당신의 숨결을 사랑합니다 사랑하기에 좋은 사람 당신이 곁에 있어 너무도 행복합니다 사랑하면 서로 편해집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그 깊이만큼 더 편해집니다 말을 해도, 안 해도, 길을 걸어도, 밥을 먹을 때도 함께만 있으면 편안합니다 내 곁에서 그렇게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599 “영혼 돌보기”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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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2016-12-02
“영혼 돌보기” 언젠가 TV에서 수술을 집도하고 있는 의사의 모습을 시청한 적이 있습니다. 가만히 서서 손끝만 움직이고 있는데도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습니다. 아주 조그만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주의 깊은 눈빛과 빠르고 섬세한 손놀림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뭉클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TV를 끄고 난 뒤 허전하고 서글픈 마음이 몰려왔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다루는 우리의 태도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자신의 영혼을 다루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푸줏간의 점원처럼 부주의하게 자신의 영혼을 다루고 있음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에 심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셔서 우리에게 선사하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은 그 선물을 우리가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보시고 계십니다. 요즘은 외모제일주의가 판치는 시대입니다. 자신의 외모를 가꾸기 위해 땀을 흘리거나 돈을 투자하는 것을 조금도 아까와 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심지어는 위험한 성형수술조차 마다 하지 않습니다. 외모를 멋있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외모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정작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영혼은 돌보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폐허가 되어가는 줄도 모르고 영혼을 방치해 버립니다. 방치된 곳은 반드시 폐허화됩니다. 가정 집 뒷마당 정원도 한 달만 방치해 두면 보기 사나운 모습이 됩니다. 아무리 집이 번듯하다 하더라도 폐허화 된 정원은 그 집의 가치를 하락시킵니다. 영혼이 방치되면 폐허화 현상이 찾아옵니다. 영혼이 폐허화되면 인생의 가치는 하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의 영혼입니다. 가치체계는 존재의 시간성에 비례합니다. 쉽게 말해서 존재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존재기간은 어느 정도일까요? 성경은 영혼의 한계를 ‘영원’이라 정의합니다. 영혼은 불멸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영혼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입니다. 정작 가치있는 것을 돌보지 않는 잘못을 우리 모두가 범하는 것은 아닐런지요? 오늘은 우리의 영혼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주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교우들과의 교제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영혼을 보살피고 돌아보는 복된 날을 만들어 봅시다. 그리고 나의 영혼을 위해서 시간, 물질, 그리고 수고를 아끼지 않겠다는 깊은 결심이 이루어지는 주일이 되게 합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요한삼서 2절)” 사도 요한의 축복과도 같이 여러분의 영적인 삶을 이끄는 저도 동일한 소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의 영혼이 잘되기를 원합니다. 영혼이 아름답게 세워짐으로써 얻는 모든 축복이 여러분의 삶에 넘쳐나기를 진심으로 간구합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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