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우리를 전율케 하는 하나님의 선택’
초등학교 때 저는 무척 내성적이었습니다. 그래도 담임선생님의
사랑을 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내성적이어서 선생님의 눈에 드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선생님은 간혹 교무실로 학생들을 심부름 보내시곤 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교무실에
심부름 다녀올 사람…”하며 심부름을 할 아이를 찾으셨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들고 “저요! 저요!”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심지어 어떤 아이는 책상 위로 올라가서 어떡하든 선생님의 눈에 들기 위하여 손을 번쩍들고 풀쩍 풀쩍 뛰며 자기를 뽑아달라고 애를
쓰는 녀석도 있었습니다. 결국 선생님의
선택을 받은 아이는 무슨 개선장군이 된 듯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의 선택을 받은 아이를 바라보는 다른 아이들은 너무 부러워서 시샘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담임선생님은 또 교무실로 심부름 할 아이를 찾으셨습니다. 어떤 아이는 손을 들고, 어떤 아이는 책상 위로 올라가고… “저요! 저요!”를 외치면서 선생님의 지명을 애타게 구했습니다. 성격이 조용한 탓에 아무 기대감 없이 소극적으로 손을 들었습니다. 제가 뽑힐 것이라곤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한채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이 저를 지목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지성이가 교무실에 다녀와” 그 순간 교실은 조용한 적막에 쌓였습니다.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충격이었습니다. 그리 소극적인 이 김지성이를 선생님이 지명하실 줄은 그 누구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40여년이 지난
머나먼 옛날의 이야기지만, 전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감격에 감격… 제가 선생님의 눈에 들었다는 감격… 제가 선생님을 위해 선택받았다는 그 감격… 그 감격 때문에 말입니다.
간혹 그리스도인으로서 ‘항상 기뻐하라’는 성경의 명령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 있습니다. 사실 이에 대한
답변은 쉽지가 않습니다. 분명 그리스도인으로서
‘항상 기쁨의 삶’은 성경의 명령임을 알지만,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기쁨의 정도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도 때론 기쁨이 완전히 상실된 순간도
있음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저는 ‘하나님의 선택’을 생각해 봅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선택이 저를 기쁘게 만든 이유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선택은
황홀함을 느끼게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음을 말입니다. 온 우주를 지배하시며, 모든 것의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자격으로 따지자면 무자격자인 ‘나’를 지명하여 선택해 주셨다는 그 사실은 삶을 전율케 만드는 이유가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현실의 조건과 환경은 우리를 피곤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악을
써도 기쁨은 가식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 현실일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할 줄 몰라 기쁨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기쁨을 누릴 분명한 이유가 없기에 기쁨이 메말랐음을 하나님은 모르시는지… 야속하게도 성경은 항상 기뻐하는 삶을 자꾸만 강조합니다. 그래서 더 피곤해 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애써 외면해도 절대로 바뀔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신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 속에는 이 부인할 수 없는 ‘선택’이라는 중요한 명제가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따스하고 사랑스런 눈길이 머문 인생이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택이 내 삶에 임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너무 큰 분, 너무도
위대하신 분, 그리고 너무도 영광스러운 분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음을 기억해 봅시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자신에게 머문 예수님의 시선 때문에
너무도 기뻐하며 즐거워했던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가 품었던 그 충만한 감동은 반드시 우리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과 감사로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