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LOGIN       JOIN
조회 수 : 345
2017.04.14 (14:34:39)

05.png




예수님의 부활은 진리


16세기에 갈릴레오는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한 이후 인류는 둥근 지구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주 개발로 인해 지구 밖에서 지구 사진이 전송되면서 둥근 지구의 모습은 명확히 증명까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구는 편평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학의 문외한들이 아닙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편평한 지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편평한 지구 학회International Flat Earth Society)’를 만들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미국정부와 미항공우주국(NASA)음모론으로 다루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지구가 편평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수십 편의 학술적 논문을 매년 발표하고 있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류가 우주까지 그 영역을 확장한 시대에 편평한 지구를 학문적 영역으로 구축시키려 하는 편평한 지구학추종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그저 난감하기만 합니다.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 것을 아니다라고 애써 변명하려는 것처럼 구차한 모습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은 수백 명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후 베드로에게, 열두 제자에게, 그리고 한번에 오백 명이 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야고보에게, 그리고 바울 자신에게 나타나셨다고 언급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8).  자신이 그 편지를 쓰는 동안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대다수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밝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결정적 증거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헛것을 보았다라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너무도 그리워한 나머지 헛것을 본 것이란 말이 그것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부활은 조작된 음모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실제로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했을 뿐임으로 부활에 너무 깊은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입니다.  음모설 중 또 다른 내용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속임수를 썼다는 주장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서 빼어낸 후 부활했다고 거짓 소문을 내었다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사실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사실이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증거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위에 가장 강력한 증거는 세 개가 제시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활의 목격자들입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목격자는 수백 명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들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목격자들 대부분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며 생명을 걸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증거는 예수님의 부활 후 예수님을 따르고,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모습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던 믿음의 선배들은 그 분께 목숨을 걸었습니다.  삶의 방향을 예수님을 향해 과감히 전환시켰습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터뜨렸습니다.  오직 예수가 인생의 지표와 목적이 되었습니다.  부활신앙은 진리입니다.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은 예수를 선택한 우리의 절대 가치임을 결코 잊지 맙시다.


2017년 부활의 아침에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623 “한걸음 뒤로 물러서기” 첨부 파일
Global
482 2017-06-09
“한걸음 뒤로 물러서기” 지난주 선배 목사님과의 대화입니다. “김목사, 이제 좀 뭔가 보이지 않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난 말이야, 이제 희미하지만 무언가 보이기 시작해” “죄송합니다, 목사님. 전 아직…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요” “허허. 한걸음 뒤로 물러나 보면 보이다네” 되새겨보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직접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묘수가 구경꾼이 되면 보이 듯 말입니다. 이겨야 되고, 아니 이기고 싶은 승부욕을 불태우는 현장의 일원이 되면 절대 보이지 않던 출구가 정작 포기하면 보이 듯 말입니다. 프랑스의 화가인 ‘조르주 쇠라(Georges-Pierre Seurat)’ 는 현대미술의 초석을 놓았던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무수한 점으로 구성된 화면이 특징입니다. 그의 그림을 가까이 보면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를 거의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그림을 감상하려면 반드시 몇 걸음 뒤로 물러서야만 합니다. 한걸음 뒤로 물러서 그의 그림을 응시하면 전시관 빛과 결합된 무수한 점들이 드러내는 강렬한 색채와 분명한 선이 보입니다. 그리고 또 한걸음 뒤로 물러서면 화폭 전체에 퍼진 통일성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와’하는 탄성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인생살이는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로 구성되는 것 같습니다. 인생의 행복은 이 두가지가 충족될 때 경험됩니다. 부지런하고 승부욕이 강한 사람일수록 이 두가지를 위해서 시간과 열정을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그럼에도행복감보다 오히려 좌절감에 몸부림치게 되는 이상한 결과를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중요하지만 지나쳐버린 그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꼭’이라는 접두사를 놓친 것입니다. ‘해야 할 일’과 ‘꼭 해야 할 일’은 같은 듯 하지만 다를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일’과 ‘꼭 하고 싶은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야 할 일’은 못하면 미룰 수 있는 일 또는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해야 할 일’은 결코 미뤄서는 안되며 대신하기에는 그 중요함이 너무도 큰 일을 뜻합니다. ‘하고 싶은 일’은 ‘할 수 있으면 좋지만, 여건이 안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꼭 하고 싶은 일’은 ‘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될 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꼭 해야 할 일’과 ‘꼭 하고 싶은 일’은 삶의 현장에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삶의 현장에서 한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면 그 때서야 비로소 보이게 됩니다. 그렇기에 성공하는 인생은 한걸음 뒤로 물러서는 일을 아까와 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한걸음 뒤로 물러서기가 필요했습니다. ‘꼭 해야 할 일’과 ‘꼭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우 여러분들의 깊은 이해를 구합니다. 언제나 저를 사랑해 주시고, 저의 축복이 되신 교우 여러분들이시기에 이번에도 너그러운 양해를 해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럼에도 담임목사로서 3개월간 교회를 비운다는 것은 여전히 큰 부담입니다. 하지만,염치 없이 과감한 한걸음 물러서기를 시도하려 합니다. ‘꼭 해야 할 일’과 ‘꼭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한다면 큰 후회가 제게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걸음 물러서서 교회와 저를 바라보겠습니다. 그리고 ‘꼭 해야 할 일’과 ‘꼭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돌아오겠습니다. 3개월간 평안하시고 기도 속에서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길 소원합니다. 여러분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22 “행복한 사람” 첨부 파일
Global
277 2017-06-02
“행복한 사람” 목사로서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목양하는 우리교회 성도들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기쁠 때는 교우들이 행복해 할 때 입니다. 제가 고민할 때는 교우들이 행복해 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것이 참 이상 합니다. 아직도 인격적으로 부족한 면이 많아서인지는 몰라도 모든 사람에 대해서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 교우 여러분들의 행복만큼은 저의 행복이 됩니다. 잘 풀리지 않는 어려운 상황이 반전되어 얼굴에서 잠시나마 염려와 걱정이 사라진 교우들의 모습을 대할 때 저도 한시름 놓게 됩니다. 잘 되어 가는 삶에 더 기쁜 형통이 찾아옴으로 환한 미소를 짓는 교우들을 대하면 저의 기쁨 또한 배가됩니다. 정말 여러분이 잘되면, 그래서 여러분들이 행복하면 그것은 저의 진정한 행복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행복감이 항상 우리들의 주위에 머물러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감도 잠시 우리들은 또 다시 염려와 시름 속으로 빠져들도록 만드는 날들을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들의 또 다른 갈등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고민이 됩니다. 어떻게 교우들이 행복해 질 수 있을지를 말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선택한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면. 정말로 행복과 거리가 먼 삶이라면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은 행복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행복을 위한 중요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행복에는 맞춤이 없습니다. 낮은 곳이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흘러가는 물처럼 행복은 호화로운 저택에도 들어가지만, 쓰러져 가는 허름한 집에도 들어갑니다. 행복에는 맞춤이 없습니다. 어떠한 수준에 도달하면 행복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하다는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누구나, 어떤 때나 느낄 수 있는 것이고, 그 것을 느끼는 횟수에도 제한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 행복의 기준을 정해 놓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의식에 젖어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행복의 기준을 정해 놓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큰 집을 장만해야만, 멋진 승용차를 가져야만! 이런 것들이 없으면 불행하다고 미리 기준을 정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고 싶다면 행복의 기준을 정해 놓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기준을 정했다면 허물어 버리면 됩니다. 내가 만든 행복의 기준은 행복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쫓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명기 33:29)"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기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행복은 우리의 삶에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큰 문제는 행복이 찾아왔음에도 내가 갈망하는 행복의 조건이 그 행복을 볼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릴 수 있음에 행복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섬길 수 있는 교회가 있기에 행복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행복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믿음과 은혜를 공유할 수 있는 교우들이 있음에 행복해 본 적이 있으셨나요? 하나님께서 나를 이미 행복한 사람으로 부르셨다는 전제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행복의 조건이 충족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맞춤형 행복. 그것을 철회시켜야 합니다. 이런 저런 조건을 들고 행복의 유무를 따지는 맞춤형 행복은 진정한 행복으로 인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행복한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심호흡을 크게 내쉬고 외쳐보십시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21 “배보다 큰 배꼽” 첨부 파일
Global
316 2017-05-19
“배보다 큰 배꼽” 얼마전 잘 작동되던 손목시계가 갑자기 정지해 버렸습 니다. 할 수 없어 수리점에 시계를 맡겼습니다. 시계 수리 공이 원인을 찾으면 전화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두 주 정 도 지나서 시계 수리공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문제 를 찾았고 부속 몇개를 교체했다는 것입니다. 잘되었다 싶었고, 수리비용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보니 250불이 라는 것입니다. 시계 구입 가격이 200불이었는데 수리비 용이 250불이라니 황당했습니다. 왜 이리 수리비용이 높은가를 물어보았습니다. 요즘 시계는 부품들이 소형화 되고 정교해져서 문제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 습니다. 문제를 찾는데 2주가 걸렸고, 부품교 체 비용을 감안한다면 그 정도는 지불해야 마땅하다는 답변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인 듯 여겨졌습니다. 아무나 찾을 수 없는 문제를 찾아내었고, 이를 말끔하게 수리할 수 있는 실력에 대한 비용 청구이니 당당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구입비용 보다 더 많은 수리 비용에 대해서는 이해가 되면서도 고민을 안겨줍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핵심가치보다 주변가치가 더 상 승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살다 보면 이런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느껴지는 상황을 종종 접하게 됩니다. 그럼 에도 때로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일’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한 드라 크마를 잃어버렸던 여인에 관한 내용이 그 중 하나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따지자면 50불, 60불 정도의 가치를 지닌 동전입니다. 그런데 이 동전의 소유주인 한 여인이 그것을 잃어버렸던 것입니 다. 아무리 찾아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 속상해 했던 여인이 우연히 그 동전을 찾게 된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동전을 찾은 기쁨에 그 여인은 잔치를 배풉니다. 그 잔치를 준비하기 위해 들어간 비용 은 한 드라크마의 서너배는 족히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 이런 상황이 아니겠습 니까?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는 경제적 원리를 설명하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관심을 드러내고자 하심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경제적 원리를 따지자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것을 선택하는 것은 바보짓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원리로 설명하자면 정말 가치가 있는 일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끔 받는 질문입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인데 성도들과 교제하느라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좀 잘못된 것 아닌가요?” 예배를 사랑하고 본질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 질문에 담겨있습니다. 그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너무도 사랑스럽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을 드립니다. “좋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큰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예배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성도의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성도 들을 하나님은 너무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실 것입니다. 동시에 성도들이 서로 교제를 통해서 사랑과 섬 김을 나눈다면 하나님은 이를 더욱 기뻐하실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생각이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주일은 예배가 가장 소중한 날입니다. 교회에 머물러 예배를 위해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쏟아 부어야 하는 날 이 주일 맞습니다. 그런데 언뜻 예배보다 성도간의 교제에 더 초점이 맞추어지는 느낌이 드는 순간도 있습니 다. 그럴때 고민이 됩니다. 시간과 정성을 예배보다 성도들의 교제에 더 많이 투자하는 듯한 느낌이 바로 그 고민입니다. “이래도 되나?” 라는 마음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일’들이 종종 발생합니다. 물론 본질을 무시한 행동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소중함과 가치가 드러 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일을 뜻합니다. 고쳐야했던 제 시계는 제 딸의 선물이었습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받은 첫 봉급으로 아빠를 위해 사준 소중 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입비용보다 더 많은 수리비용이 청구되었습니다. 잠시 고민을 했지만 저는 결심 을 했습니다. 250불의 비용을 지불하고 시계를 찾으리라. 왜? 그 시계에는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제 딸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일도 고민없이 받아들이는 것에 인색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20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지도자” 첨부 파일
Global
287 2017-05-12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지도자” 미국은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의 지도적 국가로 자리매김을 합니다. 오늘날 제국이라 꼬집어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의미상 미국이 이 시대의 유일무이한 제국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미국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학문, 군사력을 통해서 막강한 영향을 세계 구석 구석에 행사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공용어인 영어는 세계의 표준어입니다. 미국의 화폐인 달러는 세계의 공용 화폐입니다. 역사 이래로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는 미국입니다. 영화와 대중음악의 중심은 여전히 미국입니다. 세계 금융과 경제의 중심지는 뉴욕의 월스트리트입니다. 그 어떤 나라도 넘볼 수 없는 강력한 무기체계를 갖추고 세계의 경찰국가로 자임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이 유일합니다. 미국의 힘이 빠르게 쇠퇴할 것이다라고 예측하지만, 미국의 존재감은 여전히 독보적인 것을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200여년이라는 짧은 역사로 이런 찬란한 문명의 중심을 이룬 제국은 역사상 미국이 유일합니다. 이런 미국의 힘의 바탕은 무엇일까요? 학자들이 꼽는 국가적 힘의 원천 중 하나가 통치 신념입니다. 미국은 왕이 통치하는 왕정 정치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던 시기에 건국된 나라였습니다. 미국 건국에 공헌한 국부들은 미국의 정치철학을 ‘민주주의’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국민이 국가의 주권을 갖는 나라를 건국하는 신념과 더불어 국민의 정치참여를 전제로 하는 연방제 국가의 헌법을 수립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절대 신봉자였던 조지 워싱턴은 국가 최고 지도자는 곧 군주(왕)이라는 절대 공식이 고착된 시대에 일정한 임기를 가진 생소한 대통령제를 추진했습니다. 조지 워싱턴이 민주주의를 정치 신념으로 갖게 된 배경은 성경에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조지 워싱턴은 성경을 통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절대 확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섬기는 것이 곧 정치요, 통치라는 사실을 확신했기에, 군림하는 통치자가 아닌 섬기는 통치자가 미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미국 국민들을 거꾸로 설득해서 임기제에 의한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근대 민주주의의 초석을 수립한 것입니다. 이후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조지 워싱턴의 정치 신념을 계승 발전시켜오고 있습니다. 16대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정치철학을 발표했고, 민주주의를 모체로 하는 힘의 근간을 세웠습니다. 이 민주주의적 신념은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에 의해 존중되고 있으며, 오늘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은 취임 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합니다. 이는 군림하는 지도자가 아닌 국민을 섬기는 지도자가 되겠다는 정치 신념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덧붙여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통치 철학이 미국을 오늘날 최고의 강국으로 세우는 힘이 된 것입니다. 한국의 제19대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는 보수와 진보 양진영으로 나뉘어 치뤄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떻게 보면 국가적 혼란을 더욱 가중시킨 결과를 이번 선거가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습니다. 새로 뽑힌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와중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위치에 서야 할까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정치적 성향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정치적 성향의 스펙트럼은 보수적 색채, 진보적 색채, 중도적 색채, 급진적 색채 등등으로 다양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색깔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로 이어지는 복음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 외 정치적 색채는 각자의 취향일 뿐입니다. 보수냐 진보인가를 두고 그리스도인들까지 나서며 분열을 꾀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치 성향에 대한 선택은 각자의 자유입니다. 다만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된 것은 보수냐 진보냐에 관계없이 강력한 수정을 요구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 외 정치 색깔을 가지고 극한 논쟁에 휘말리는 것은 별로 유익하지 않습니다. 새로 선출된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미우나 고우나 한국의 미래를 결정지을 열쇠를 거머쥐고 있는 사람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라기는 그가 미국의 조지 워싱턴이나 링컨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성경의 정신을 지키는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미국의 조지 워싱턴과 아브라함 링컨같은 바른 정신을 가진 대통령이 배출되도록 마음 모아 기도를 시작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19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부흥” 첨부 파일
Global
294 2017-05-05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부흥” 전 세계에 일어난 기독교 부흥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부흥의 도화선이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20세기에 들어오며 기독교의 강력한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출발은 영국의 ‘웨일즈’였습니다. 1904년 영국을 강력한 기독교 부흥의 불길 속으로 이끈 사람은 ‘이반 로버츠’입니다. ‘이반 로버츠’는 탄광의 광부로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목회자 후보생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느날 설교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열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설교를 할 수 있도록 교회에 간청을 하게 되고, 그 요청이 받아들여져 17명이 모인 어느 수요일 밤 예배에서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어눌한 설교였지만 성령이 크게 역사하셨고 그 예배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날이 바로 200만명의 불신자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오게 되는 영국의 웨일즈 부흥의 출발이 됩니다. 당시 웨일즈 지역의 신문들은 이 부흥운동으로 인한 변화에 관련된 기사를 많이 실었습니다. 법정에서 재판과정 중 재판관과 배심원들이 피고인을 위한 강력한 기도를 하게 되며, 피고인은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회심하기도 했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당시 웨일즈 지역에는 탄광이 많았고 이 곳에 수많은 광부들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광부들의 난폭한 기질과 거친 삶의 모습으로 크고 작은 문제가 끊일 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를 믿고 삶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들의 변화는 지역 집중적인 취재의 대상이 되었고, 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한국의 부흥은 1907년 평양에서 불꽃을 피웠습니다. 평양대부흥의 결과 한국은 복음화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평양을 휩쓸고, 한반도 전역에 퍼져나가며 복음의 능력이 우리 한민족에게 전달됩니다. 이 평양대부흥의 도화선은 1903년 캐나다에서 파송된 ‘로버트 하디’라는 젊은 의료선교사의 회개가 도화선이 됩니다. 한국에 와서 3년간 사역을 했음에도 한 명의 결신자도 얻지 못했던 하디는 실망감과 무기력한 마음으로 힘들어 했습니다. 이런 사역의 결과가 자신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무식과 게으른 민족성도 큰 몫을 차지했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하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한국인을 얕보고 내려다 보는 깊은 교만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하디는 원산지역의 선교사 모임에 강사로 초빙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게 됩니다. 그 모임에서 하디는 성령의 깊은 감동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인지를 깨닫게 되며, 회개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 하디의 회개가 평양대부흥의 결정적 불씨가 됩니다. 그는 참석한 모든 사경회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각 교회에서 회개의 운동을 일으키며, 급속한 삶의 변화를 드러내는 열매를 맺게 만듭니다. 한 사람의 회개와 헌신은 불꽃이 됩니다. 불꽃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그리고 강력한 화염을 일으키며 대부흥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기독교는 세계사의 가장 강력한 물줄기를 형성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독교를 배제하고는 역사를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최상의 표현이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역사 속에 자리잡은 기독교의 엄청난 영향력을 섬세하게 관찰해 보면 한결같이 도화선을 이룬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폴리캅, 어거스틴, 마틴 루터, 존 칼뱅, 존 낙스, 요한 웨슬레, 조나단 에드워드가 그들입니다. 그들의 회개와 헌신은 기독교의 부흥과, 더 나아가 인간의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 변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람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사고체계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며, 국가와 제도의 탄생에 결정적 원인을 제공하는 결과까지 이루게 됩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대한 역사의 출발은 한 사람으로 시작됩니다. 대변혁의 중심은 한 사람이면 족합니다. 인류의 대재앙이라 할 수 있는 타락이 아담 한 사람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위대한 반전인 속죄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결론짓게 된 것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구나 꿈꾸는 위대한 부흥, 그 부흥의 도화선은 한 사람입니다. 그 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 될 수 있습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18 “나의 자랑은?” 첨부 파일
Global
324 2017-04-28
“나의 자랑은?” ‘게티센터’는 LA가 왜 세계적인 도시로 인정받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LA다운타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서북쪽 브렌트우드 언덕 정상에 유백색의 건물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게티센터’에서 내려다보는 LA메트로폴리탄의 전경은 아름다움의 극치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가 심혈을 기울여 설계한 모던한 분위기의 ‘게티센터’는 주변의 풍광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건물 자체가 예술 작품이라는 느낌을 갖도록 만들어 줍니다. 1984년에 착공해서 1997년에 완공했으니 건축 기간만 13년입니다. 건물 외부를 싸고 있는 건축 자재는 유리, 에나멜로 표면 처리한 알루미늄, 그리고 화강암과 대리석의 중간 단계 정도쯤 되는 ‘트라버틴’이라는 이탈리아산 고급 석재가 주 자재입니다. 건축 비용만 13억 달러 정도가 들었다니 건물의 가치와 그 규모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게티센터’ 전시실에는 빈센트 반 고흐, 에두아르 마네, 에드가 드가, 폴 세잔, 에드바르트 뭉크, 램브란트 등 미술사에 보석처럼 존재했던 세계적 명장들의 작품 450점 정도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작품은 석유재벌이었던 ‘폴 게티’가 평생에 걸친 수집품이며, 이 후 ‘폴 게티 재단’은 계속해서 세계적 걸작품들을 수집 중에 있습니다. 2014년 뉴욕의 미술 경매에서 19세기 프랑스 인상파 화가였던 에두아르 마네의 ‘봄’이라는 작품은 6천500만불에 ‘게티센터’로 낙찰된 것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고가의 미술작품이 450여점 이상 소장되어 있는 곳이 ‘게티센터’입니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건축한 건물도 장관이지만, 이 건물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역사적 걸작품들도 관람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게티센터’하면 무엇을 연상하게 될까요? 웅장한 건물일까요? 아니면 그 안에 소장된 미술작품일까요? ‘게티센터’의 소개책자에는 건물이 아닌 그 안에 소장된 작품들이 표지에 올려져 있습니다. 건물 하나만으로도 LA를 상징할 수 있는 랜드마크라 여기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음에도 ‘게티센터’의 소개책자는 에두아르 마네의 ‘봄’, 렘브란트의 ‘군복 입은 노인’, 에드가 드가의 ‘기다림’ 또는 반 고흐의 ‘아이리스’ 같은 미술 작품이 정면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건물가치도 거의 천문학적 수준을 자랑하지만, 실제로 ‘게티센터’의 가치는 건물보다 소장하고 있는 미술 작품에 비중을 두고 있다는 느낌을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최고급 자재를 사용해서 지어진 웅장한 건물에 비하면 보기에 따라 별 것 아닌 것 같이 여겨질 작은 액자 속의 미술 작품들이 더 가치를 드러냅니다. ‘게티센터’는 건물을 자랑하기 보다, 소장하고 있는 ‘작품’을 자랑거리로 삼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자랑으로 삼아야 할까요? 자랑거리는 가치와 비례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습니다. ‘랜드마크’는 한 지역의 상징입니다. 상징으로 삼는 ‘랜드마크’는 그 지역의 최고 자랑거리가 차지하게 되어있습니다. 한 지역에서 가장 가치로 여기는 것이 자랑거리가 되고, 그것이 그 지역을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되는 것입니다. ‘게티센터’는 건물을 자랑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내세우고 싶은 것은 그 웅장하고 화려한 최첨단의 건물이 아닌 듯 보였습니다. 그들이 자랑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소장하고 있는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품들이었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자랑거리로 삼아야 할까요? 사람에 따라 가치관이 다르니 자랑거리는 사람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자랑거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재력을 자랑거리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학력을, 어떤 사람은 명예를… 인생의 표지를 장식하는 것이 자랑거리가 분명합니다. “나의 인생 표지에 올려놓은 것은 어떤 것일까?”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되새겨 보아도 내 인생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십자가’가 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14)”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17 “과연 그저 버려진 곳에 불과할까요?” 첨부 파일
Global
287 2017-04-21
“과연 그저 버려진 곳에 불과할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지역이 있습니다. ‘사해’가 그곳입니다. ‘사해’는 죽은 바다라는 뜻입니다. ‘사해’는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호수 입니다. 염분 농도가 너무 강해서 강가나 호숫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고기를 비롯한 많은 생명체들이 서식할 수 없는 곳입니다. 해수면보다 1309 피트(399미터)나 낮은 곳에 위치해 있는 관계로 한여름 낮 기온은 살인적인 더위로 맹위를 떨칩니다. 또한 강한 바람은 소금기를 날려 주변 지역을 계속 사막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관계로 사해지역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오랜 세월 버려진 땅에 불과했습니다. 일년 중 강수량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 중의 한 곳. 소금기를 묻힌 강한 바람의 영향으로 농작물 경작은 거의 불가능한 지역. 호수라 하나 세계에서 가장 염분 농도가 높은 관계로 사람에게 전혀 도움되는 것은 전무하다 여겨졌던 지역. 그곳이 바로 ‘사해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사해를 오래 전에 버렸습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사해 지역’은 이스라엘을 먹여 살리는 ‘보고(寶庫,Treasure Island)’입니다. 사해 지역은 오랫동안 축적된 자연 미네랄 덩어리라 할 수 있는 ‘사해 진흙’이 널려 있습니다. 이 ‘사해 진흙’은 질 좋은 의약용품과 화장품의 주원료가 되기에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사해 지역’은 세계 최고의 청정지역이라 알려져 있는 지중해에 비해서 대기 중 산소농도가 15%이상 많은 곳입니다. 그래서 각종 질병 호전에 탁월한 효과를 보입니다. 그렇기에 사해 지역 곳곳에 의료센터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사해’를 중심으로 리조트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유럽과 미국의 관광객들이 일년 내내 북새통을 이룰 만큼 이스라엘의 관광산업의 중심지가 된지 오래입니다. 특히 ‘사해’는 칼륨, 브롬과 공업용 광물질이 널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각종 엄청난 양의 화학물질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는 사해를 주목합니다. 이런 이유로 사해는 이스라엘의 먹거리입니다. 저주받은 곳이라 여겼지만, 사실 사해는 이스라엘을 위한 축복의 통로입니다. 별 것 아니라 무관심하게 여겨 질 수 있는 곳에 하나님의 숨겨진 축복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심지어 부끄럽게 여길 수 있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닌 ‘자랑스러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입니다. 겉모습만으로 본다면 ‘사해 지역’을 평가하자면 ‘저주 받은 땅’이 분명합니다. 풀 한 포기 찾을 수 없는 황량한 벌판의 연속. 뜨거운 태양 아래 증발하는 호수는 하얀 소금기를 여지 없이 드러낼 뿐 생명의 흔적을 매정하게 지워버리는 듯한 느낌을 줄 뿐입니다. 그 새 사막의 뜨거운 열풍이 귓가를 때린다면, 마음은 더욱 어지러워지고 어서 이 황량한 곳을 빨리 탈출하고 싶은 충동만이 남게 됩니다. 하지만 그 누군가에 의해서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사해’ 속에 담긴 의미를 찾고자 하는 연구는 시작되었을 것이고, 결국 ‘사해’ 속에 담긴 숨겨진 축복은 밝혀지고야 만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도 검증 한번 받지 않은 채 버려진 영역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고난, 또는 운명의 장난이라 정의하며 애써 회피하고 무관심하게 여겨왔던 삶의 영역. 그것은 재정의 어려움일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건강의 상실일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복잡한 인간관계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에 ‘문제’라는 딱지를 붙여놓고 스스로 버림받은 영역으로 간주해 버리며 살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 ‘문제’의 진짜 민낯을 연구해 보면 어떨런지요? 의외로 그 회피해 버리고 싶은 문제의 영역이 ‘문제’가 아닌 진정한 ‘축복’일수도 있음을 발견하게 될지 모르잖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필요 없는 무가치한 것을 우리의 삶 중심에 허락하실 리가 없습니다. 검증해 봅시다. 버려진 채 방치된 우리의 삶의 영역을 말입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Selected “예수님의 부활은 진리” 첨부 파일
Global
345 2017-04-14
“예수님의 부활은 진리” 16세기에 갈릴레오는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한 이후 인류는 둥근 지구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주 개발로 인해 지구 밖에서 지구 사진이 전송되면서 둥근 지구의 모습은 명확히 증명까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구는 편평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학의 문외한들이 아닙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편평한 지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과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편평한 지구 학회International Flat Earth Society)’를 만들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미국정부와 미항공우주국(NASA)의 ‘음모론’으로 다루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지구가 편평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수십 편의 학술적 논문을 매년 발표하고 있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류가 우주까지 그 영역을 확장한 시대에 ‘편평한 지구’를 학문적 영역으로 구축시키려 하는 ‘편평한 지구학’ 추종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그저 난감하기만 합니다.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 것을 “아니다”라고 애써 변명하려는 것처럼 구차한 모습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은 수백 명에 이르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후 베드로에게, 열두 제자에게, 그리고 한번에 오백 명이 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야고보에게, 그리고 바울 자신에게 나타나셨다고 언급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8). 자신이 그 편지를 쓰는 동안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대다수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밝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결정적 증거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헛것을 보았다라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너무도 그리워한 나머지 헛것을 본 것이란 말이 그것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부활은 조작된 음모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실제로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했을 뿐임으로 ‘부활’에 너무 깊은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입니다. 음모설 중 또 다른 내용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속임수를 썼다는 주장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서 빼어낸 후 부활했다고 거짓 소문을 내었다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사실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사실이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증거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위에 가장 강력한 증거는 세 개가 제시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활의 목격자들입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목격자는 수백 명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들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목격자들 대부분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며 생명을 걸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증거는 예수님의 부활 후 예수님을 따르고,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로 다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모습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던 믿음의 선배들은 그 분께 목숨을 걸었습니다. 삶의 방향을 예수님을 향해 과감히 전환시켰습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라는 고백을 터뜨렸습니다. “오직 예수”가 인생의 지표와 목적이 되었습니다. 부활신앙은 진리입니다.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은 예수를 선택한 우리의 절대 가치임을 결코 잊지 맙시다. 2017년 부활의 아침에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15 “이제 차세대와 세상을 향해 곧게 뻗어 나가려 합니다” 첨부 파일
Global
321 2017-04-07
“이제 차세대와 세상을 향해 곧게 뻗어 나가려 합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사군자라 불렀습니다. ‘군자’란 완전한 인격을 가진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네가지 식물을 ‘군자’라 칭한 것은 고고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 속에 인생을 향한 교훈적 요소가 담겨 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중 대나무는 신비한 식물로 오랫동안 여겨왔습니다. 조선시대 시인이자 문신이었던 윤선도는 그의 시 ‘오우가’에서 대나무를 친구로 빗대어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식이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토마토가 과일이 아니듯, 대나무는 ‘나무’가 아닙니다. 식물학적으로 외떡잎 식물인 ‘풀’이라고 합니다. 나무 같지만 나무의 특성보다는 풀에 가까운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풀은 일반적으로 열매를 맺은 뒤 이파리와 줄기가 시들어 죽습니다. 그럼에도 대나무는 여러 해가 지나도 이파리와 줄기가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대나무는 이상한 신비를 갖춘 식물입니다. 종자를 심고 몇 년이 지나도 싹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몇년 동안 어린 대나무인 죽순이 돋기만을 기다리며 공들여도 좀처럼 움이 트지 않습니다. 길게는 7년이 넘게 움이 트지 않는 대나무도 있다고 합니다. 대나무는 보통 심은지 5년이 되는 해에 비로소 죽순이 돋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죽순이 나온 날로부터 석달이라는 짧은 시간에 그 크기가 무려 53피트(16미터)에서 82피트(25미터)까지 자랍니다. 용수철이 튀어오르는 것과 같은 경이적인 성장입니다. 정말 이상한 나무입니다. 구조적으로 살펴보면 이렇게 경이적인 성장을 하기엔 열악한 조건을 갖춘 식물입니다. 왜냐하면 대나무는 속이 거의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나무는 줄기의 속이 꽉 차있어 그 밑동이 굵어야만 가지를 뻗어내면서 하늘로 높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대나무의 줄기는 위로 뻗어 올라가기에는 턱없이 얇고, 속마저 부실합니다. 그런데 성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더군다나 곧은 성장을 합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이 대나무를 두고 하는 말인 듯 싶습니다. 대나무는 땅 속에서 놀고 있거나, 잠들어 있던 것이 아닙니다. 5년간 대나무는 땅속에서 섬유질의 뿌리 구조를 형성시키며 깊고 넓게 자신을 땅속으로 견고하게 확장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5년째 대나무는 땅속 줄기의 마디에 곁눈을 부풀려 전봇대처럼 솟아 오르는 것입니다. 다른 나무처럼 구조적 조건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속이 비어 있어 곧게 성장하기 어렵지만, 성장의 동력을 한순간도 아끼지 않습니다. 성장하는 것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동시에 비뚤어짐 없이 곧게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갑니다. 바람이 불면 대나무는 휘청거리도 합니다. 대형나무들이 견고하게 서있는 모습과 비교하자면 위태롭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저러다가 꺾여지는 것은 아닐까라는 조바심마저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그럼에도 대나무가 꺾이는 일은 없습니다. 엄청난 위력의 태풍이 불고 지나간 자리에 아름드리 고목나무가 뿌리채 뽑혀나가거나, 줄기자체가 꺽여버린 참담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대나무가 뽑혀나갔다거나, 줄기가 꺾였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무도 아닌 것이, 그저 나약하게만 보이는 것이 어찌 그리 강한 특성을 지녔는지… 그저 경이롭기만 합니다. 길게 대나무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대나무의 모습 속에서 교회 탄생 20주년을 맞이한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언뜻 볼 때 우리 교회는 그리 대단하게 보이지 않는 듯 싶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는 경이적인 성장을 이룬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조건을 따지자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교우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전형적인 보통 교회 모습 그 자체입니다. 떠오르는 교회들이 이룬 20년의 업적에 비하면 그간 무엇을 한 것일까라고 반문해 볼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지난 20년간 우리 교회는 무엇을 이루었는가라고 질문한다면 딱히 이것이다라고 말하기 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내면을 조금 깊숙이 들여다 보면 지난 20년의 결정체가 드러나 보입니다. 대나무가 땅속에서 그 기반을 튼튼히 세우는 일에 열심이었듯, 본질을 세우는 일에 20년을 할애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힘차게 내적 성장을 도모했습니다. 성경적 삶이라는 본질회복에 주력해 왔습니다. 본질회복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닮는 일로 가능하다는 철학으로 ‘훈련목회’를 지향해 왔고, 성도들은 삶의 변화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 왔습니다. 그 일만 20년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 결과 성경적 삶은 우리의 자녀 세대로, 그리고 교회 밖의 세대까지 확장시켜야 한다는 깊은 관심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대나무의 땅속 줄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깊은 성장을 이루었다가, 이제 땅 위로 그 줄기를 올려놓으면 죽순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교회탄생 20년 만에 우리 교회는 영적 죽순을 땅 위으로 드러냅니다. 스스로의 삶의 목적을 ‘본질’에 두었던 성도들이 성경적 삶을 자녀세대까지 연장시키고, 더 나아가 교회 밖 세대까지 확장시킬 목적으로 교회의 동력을 이제 땅 위로 올려 놓는다는 뜻입니다. 좋은 조건과 능력이 넘쳐나서 그리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장의 동력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20년 동안 줄기차게 확인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은 확인을 뛰어 넘어 확신이 된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이제 축적해 놓은 영적 동력을 지상으로 올려놓고, 하늘을 향해 높이 뻗어 오르려 합니다. 교회의 3대 비전 중 하나인 성경적 삶을 위한 본질회복비전 실현에 20년이 필요했었습니다. 이제 남은 두 비전 ‘차세대 비전’과 ‘선교비전’의 완성을 위한 첫출발이 교회 탄생 2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이 되는 것 같습니다. 향후 우리교회는 차세대(자녀 세대, 영어 세대, 젊은이 세대)를 세우는 일에 주력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의 능력과 성경적 삶의 가치를 전수할 것입니다. 방황하는 차세대를 교회로 흡수시키며 그들을 복음의 동력, 미래의 동력으로 전환시키는 일에 올인할 것입니다. 동시에 ‘선교적 교회’로 교회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낼 것입니다. 선교적 교회는 교회 밖에 교회를 세우는 일에 주력하는 사역전략을 말합니다. 선교적 교회는 사람을 향해 찾아가는 교회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한 영혼이라도 구원시키며 십자가의 용사를 만드는 일이라면 그 한 영혼을 위해서 교회를 세우는 일을 시도하겠다는 의지를 뜻합니다. 이제 LA동부지역에서 20년간 영적인 뿌리를 내린 우리 교회는 선교적 교회의 죽순을 땅위에 올립니다. 필요하다면 LA동부지역 밖에도 교회의 비전을 같이 하는 교회를 지속적으로 세워가는 ‘선교적 교회’로 그 역량을 극대화시키려 합니다. 땅 속에 뿌리를 내리는 일에 5년을 필요로 했던 대나무가, 비로소 죽순을 땅 위로 밀어 올리자 순식간에 수십미터의 줄기를 하늘로 뻗어 올리듯 우리 교회는 경이로운 모습의 교회로 거듭날 것입니다. 본질회복을 위해 20년을 필요로 했던 우리교회가 ‘차세대’와 ‘선교적 교회’로 출발하면 순식간에 시대와 세상을 점령하는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그 엄청난 역사의 자리에 지금 우리 모두는 서있습니다. 교회탄생 20주년 기념주일 아침에 감사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14 “삶의 단순화” 첨부 파일
Global
370 2017-03-31
“삶의 단순화” 그린란드는 북극점에 가장 가까운 빙하와 눈보라의 땅입니다. 겨울의 추위는 평균 섭씨 영하 30도(화씨 영하 22도)에 이른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섬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사는 지역은 해안가 몇 개의 도시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섬의 관광 피크는 한겨울이라 합니다. 세계 각처에서 한겨울에 그린란드로 몰려든다고 합니다. 보이는 것은 흰 눈과 빙하 그게 다입니다. 색깔로 치자면 ‘백색’ 하나 뿐입니다. 하지만 극한의 추위 속에서 바라보는 단순한 백색의 절경은 황홀함 그 자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린란드의 겨울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그다지 아름답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눈보라와 흰 눈. 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을씨년스럽고 춥게만 느껴질 뿐입니다. 그런데 왜 관광객들이 좋고도 좋은 곳 다 놔두고 한 겨울의 극지를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칭찬할까요? 그들은 ‘절제된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색깔은 없습니다. 흰색 하나입니다. 다른 색깔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극한의 절제입니다. 그런데 극한의 절제가 실제로는 강력한 아름다움이 되는 것입니다. 절제가 바로 단순화입니다. 단순화시킨다는 것은 무언가 부족하도록 만드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 단순화가 삶으로 이어지면 삶은 아름다움을 만들며, 때로 강함도 형성시키는 것입니다. 평생 건강하게 장수하는 사람들의 건강비결을 알고 보니 별 것 아닌 것 때문에 놀라웠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비싼 녹용, 산삼 같은 거 먹지도 않고, 그저 매일 소식하고, 하루 1시간 산보한 것 이외는 특별한 것 없다는 것입니다. 건강 비결은 삶을 단순화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생 병 한번 앓은 적 없이 100세가 넘도록 장수하시는 분들에게서 단순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영적인 거장들의 경건생활을 살펴보면 산속에서 소나무 뿌리 몇 개씩 뽑으면서 금식하고 기도원에서 매일 사는 것 아닌 듯 보입니다. 서양의 기독교는 아예 기도원조차 없습니다. 물론 리트릿센터 같은 곳은 있지만 한국식 기도원의 개념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실제로 경건한 모습의 삶을 이루었던 영성의 거장들은 한국보다 여전히 서양이 우세합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중 하나가 삶의 단순화(심플라이프)가 아닐까 합니다. 영성가인 리차드 포스터는 경건의 힘은 ‘심플라이프’에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비록 강력한 기도, 체험, 뜨거움이 있다 할지라도 ‘삶의 단순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얼마 못가 깊은 침체를 경험하게 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분명히 영적인 노력이 강력하게 이루어짐에도 늘 마음은 편하지 않고 헉헉거리는 경건생활의 모습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복잡한 생각’ ‘복잡한 삶의 모습’이 그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족하는 마음’이 경건의 큰 유익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단순화입니다. 성경은 강조합니다. “소유를 단순화시키라. 태어날 때 빈 몸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죽을 때 빈 몸으로 떠난다.” 하나라도 더 소유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생활을 청산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는 물질의 악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렇게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표현하려는 핵심은 ‘단순화’를 의미합니다. 단순화에 실패하면 어떤 결과가 만들어질까요?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디모데전서 6:9)” 성경은 단순화에 실패할 때 경험되는 여러가지 폐단을 지적합니다. 시험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또 올무에 스스로 걸려들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외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이 잘 생기게 되어 결국 파멸과 멸망을 자초하는 일이 생김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복잡한 체계를 단순화하는 작업이 결국 경건의 모습을 잘 유지하는 지름길이 되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아름답고, 강한 신앙은 버릴 것은 버리고, 정리할 것은 정리하는 삶의 단순화로 가능함을 잊지 맙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삶의 단순화를 시도해 봄은 어떨까요?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13 “다시 꿈을 꿉니다” 첨부 파일
Global
375 2017-03-24
“다시 꿈을 꿉니다” 평생을 감당할 목회이기에 꼭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조직체(Organization)가 아닌 생명체(Organism)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신학교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내용이 바로 교회는 생명체라는 말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세워진 것이 교회였고, 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기관(Institute)이라고 불리는 많은 단체와는 달리 교회는 재정, 정관, 조직이 중심이 아닌 생명이 중심이라는 사실을 꼭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일체의 외부 도움을 정중히 거절한 가운데, 저희 집 거실에서 무작정 예배를 드림으로 우리 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현대 교회가 자립하고 성장하려면 다섯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잘 준비된 일정한 수의 개척멤버, 실력 있는 교역자 진용, 탄탄한 재정, 모임을 가질 수 있는 건물, 성도들의 신앙을 잘 세워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다섯가지 요소를 지닌 교회는 시작과 더불어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다고 합니다. 그러나 애초부터 그런 요소가 우리교회에는 전혀 없었습니다. 어쩌면 무모하기까지 여길 수 있는 교회의 시작이 가능했던 것은 ‘교회는 생명체’라는 대전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명의 탄생은 재정, 조직, 프로그램과 같은 외적인 요소 때문이 아닙니다. 생명의 탄생은 신비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생명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며, 보존하시기에 그 생명은 성장하고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생명체이기에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곧 맞이하게 될 우리교회의 탄생 20주년을 앞두고 ‘교회는 생명체’라는 대전제를 다시금 저에게 확신시켜 주십니다. 20년간 크고 작은 수많은 일들이 교회 위에 있었습니다. 한 그루의 푸른 소나무가 겉보기에는 보기 좋은 모습을 하고 있는 듯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세월의 풍상을 견디어낸 흔적들을 갖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목사님, 열이면 열 다 다른 교우들을 어떻게 감당하세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저를 측은히 여기는 듯 물어오는 교우들의 질문 앞에서는 늘 깊은 상념에 잠길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을 뿐입니다”라는 뻔한 모범답안을 제시하지만, 사실 그것은 저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토해내는 저의 진솔한 답변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십니다. 우리 교회의 목회를 통해서 그 사실을 배웠습니다. 아무 것도 없다 할지라도 꿈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꾼 꿈은 망상이나 공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한사람의 꿈을 현실화시킵니다. 꿈이 실현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이지,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꿈을 꿉니다. 교회가 진정한 생명체임을 확인 받았기에, 우리 교회를 통해서 온 세상에 영향을 행사하는 그 멋있는 꿈을 말입니다. 지역교회의 핵심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몇 명이냐 보다 어떤 사람이냐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 중요한 원리를 20년간의 목회를 통해서 배우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어느 곳이나 넘쳐납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의 뜻을 받들어 일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마태복음 9:37, 38)”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모여야 할 곳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를 교회탄생 20주년을 맞이하며 다시금 꿈꾸어 봅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12 “슬림화 전략” 첨부 파일
Global
349 2017-03-17
“슬림화 전략” 장거리 그리고 장기간 여행을 하는 사람일수록 가방의 무게는 늘어납니다. 여행하면서 입을 옷과 여러가지 용품들을 가방에 집어넣다보면 가방은 한도 끝도 없이 채워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행객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은 여행에서 생명줄처럼 여기게 되는 이 가방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여행 중 가장 큰 장애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들의 가방은 놀라우리만큼 슬림합니다. 집을 떠나 타지에서 몇개월 이상 체류할 사람이 달랑 손가방 하나에 배낭 하나 메고 항공기에 탑승하는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때론 꼭 필요할 것이라 생각해서 챙겨넣은 물건이 여행 중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이 그대로 집으로 돌아올 때도 있습니다. 트레블 메가진에 따르면 여행자들은 자신이 짐속에 챙겨넣은 물품의 반 정도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손도 대보지 않은채 집으로 고스란히 가져온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하나라도 더 챙길 것이 없는지를 고민합니다. 로알 아문센은 1911년 12월19일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했던 노르웨이의 탐험가입니다. 극한의 추위와 싸워야 하는 남극탐험은 목숨을 걸어야 가능한 탐험 중의 탐험이었습니다. 아문센은 남극점 탐험에 경쟁을 벌였던 영국의 탐험가 로버트 스콧이 당시 최첨단의 탐험장비를 가지고도 실패한 남극점 탐험을 끝내 성공시키고야 말았습니다. 전문가들은 아문센의 남극점 탐험 성공의 결정적 이유를 ‘슬림화 전략’에서 찾고 있습니다. 아문센은 탐험 도중 아무리 귀한 물건이라 해도 탐험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물건은 무조건 버렸습니다. 일상생활과 탐험은 가치관이 달라야 한다는 신념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행자나 탐험가나 여정에서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짐을 챙깁니다. 짐이 여정을 편안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그리합니다. 그러나 그 짐이 여정을 힘들게 만드는 결정적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삶이 여행이나 탐험같은 여정으로 많이 묘사됩니다. 그래서 가능한 인생의 여정을 편안하게 이루고 싶은 생각에 우리는 많은 것을 챙깁니다. 우리가 챙기는 것들이 인생을 좀더 우아하고 편리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확신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생 여정을 힘들게 만들거나 실패하도록 만드는 주범이 우리가 챙겼던 바로 그것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한참 후에 깨닫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인생의 짐을 얼만큼 가볍게 만드는가도 성패여부의 한몫을 거듭니다. 그래서 ‘챙기는 훈련’보다 ‘버리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챙기는 훈련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실제로 필요한 것은 ‘버리는 훈련’ 인데 말입니다. ‘버리는 훈련’이 안되면 인생의 목표점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것만이 눈에 들어옵니다. 결국 짐을 챙기다가 정작 목표점에는 도달해 보지 못하는 불행한 결과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살다보니 버릴 줄 안다는 것은 달인의 경지에 올라야만 가능함을 깨닫게 됩니다. 스승과도 같은 어떤 목회자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예전에는 얻기를 구하는 기도가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버릴 수 있는 용기를 구하는 기도가 나의 기도가 되고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슬림화 전략’을 택합니다. 버릴 수 있는한 버리는 그 슬림화 전략 말입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11 “대한민국의 연합을 위한 기도” 첨부 파일
Global
356 2017-03-10
“대한민국의 연합을 위한 기도” 조국에 대한 사모함이 이민자들의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비록 몸은 머나먼 미국땅에 살고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조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은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공통된 마음일 것입니다. 한국이 잘되면 뿌듯한 긍지가 생기며, 한국의 실정이 어려우면 뭔가 불편한 가슴앓이를 하게 됩니다. 애써 무심해지고자 해도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은 우리의 태생이 대한민국을 근본으로 하고 있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우리들이기에 한국의 대통령 파면 소식은 지난 주간 가장 뜨거운 소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작년 12월9일 국회에 의해서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었고, 석 달 만에 헌법재판소에 의해 탄핵안이 인용(결정)됨으로써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헌법적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결정이지만 워낙 사안이 민감한지라 이에 대한 후유증이 만만치 않은 듯 보입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 이후에도 탄핵 찬성집회와 반대집회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며, 반대집회에서는 헌법재판관들에 대한 강력한 항의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 그 실례라 할 수 있습니다. 걱정은 대통령 파면 그 자체라기 보다 극도로 분열된 국론입니다. 이미 한국은 보수와 진보에 따른 정치적 양극화 현상이 상당히 가속화된 상황입니다. 사실 정치적 성향이나, 사상적 성향에 따라 보수냐 진보냐가 근원적 문제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갖는가는 개인의 자유이므로 문제 삼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극히 염려스러운 것은 정치적 성향의 차이로 인해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극단적 편가르기입니다. 극단적 편가르기는 결국 형제가 적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이래서 분열이 무서운 것입니다. 이미 한국은 정치적 성향의 극한 대립에 의해 헌법재판소가 어떤 판결을 내리더라도, 어느 쪽이든 간에 깊은 불만을 표출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존중하자 말하지만 막상 그리 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분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분열된 사회일수록 사안에 대한 수용은 무척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대한민국 헌정사의 초유의 사태보다 헌법재판소의 판결 이후에도 중단되지 않는 탄핵 찬성 또는 반대라는 명목의 집회가 더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역사는 인류를 불행하게 만든 주범 중 하나가 분열임을 증거합니다. 인류를 비참하게 만든 대부분의 전쟁은 분열에서 출발했습니다. 그 실례 중 하나가 바로 우리 조국입니다. 하나의 나라로서 한반도에 존재했던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됨으로 두개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수백만의 인명피해와 더불어 여전히 또 다른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극심한 대치상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민족 분단 이 후 70여년 동안 우리 민족은 결코 평안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여전히 이념과 사상에 의한 분열, 정치적 성향에 따른 분열, 지역 감정에 따른 분열, 세대적 갈등에 따른 분열의 연속선 상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 최대의 위기라 할 수 있는 대통령 탄핵에 따른 분열의 몸살을 앓고 있는 와중에 있습니다. 잘되는 비결은 연합입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 우수한 시스템, 차별화된 능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분열의 조짐이 있는 나라는 잘될 수 없습니다. 귀신을 내쫓으시는 예수님을 책잡으려 하는 측에서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 들렸다”라는 근거 없는 주장으로 비판을 가해왔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는 버틸 수 없다 (마가복음 3:23, 24)”라고 말씀하시면서 분열은 교활한 사탄도 경계하는 일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사탄조차 자신은 분열을 경계하면서 분열을 조장하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그렇기에 분열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열되지 않고 연합의 정신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이슈는 연합입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탄핵정국의 후유증을 툴툴 털어버리고 이미 결정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하며 연합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기 위해서는 먼 미국땅에서나마 조국을 사모하는 우리 이민자들이 하나님께 깊이 탄원해야 할 것입니다. 조국을 위해 기도합시다. 조국의 연합을 위한 간절한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어찌 흘려 보내시겠습니까?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10 “사랑의 힘” 첨부 파일
Global
397 2017-03-03
“사랑의 힘” 저의 어머님은 심장판막증이란 질병으로 고생을 하신 분이십니다. 저는 어머님이 심장문제로 늘 힘들어 하신 것을 보고 자란지라 세상의 어머니가 모두 우리 어머니 같은 줄 알았었습니다. 조그만 힘든 일을 하시면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하셨습니다. 심장판막증의 가장 큰 증상은 숨이 차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님의 걸음걸이는 늘 힘에 겨운 모습이었고, 조금이라도 무거운 것은 손에 들고 다니기에도 벅차하셨습니다. 이렇게 나약한 어머니셨지만 상상할 수 없는 강한 모습을 한번 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볼거리라는 병이 저를 찾아온 것입니다. 고열로 눈동자가 돌아가고 정신마저도 가물거렸던 어느 늦은 밤. 어머니는 저를 등에 업으시고 집 근처에 있던 동네 병원을 찾으셨습니다. 혼자서 걸으시는 것조차 버거워하셨던 어머니셨습니다. 서너 걸음 걸으시다 “후”하고 한숨을 거두어들이신 후 다시 힘겨운 발걸움을 옮기시는 것이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저를 등에 업으시고 동네 병원을 향해 뛰어가신 것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 병원문을 두드리시고 아들을 살려달라시던 어머님의 외침은 가물가물 거리는 희미한 정신 속에서도 분명히 들을 수 있는 소리였습니다. 그 어머니의 모습은 예닐곱 살 밖에 되지 않은 철부지였던 저의 마음 속에 분명한 확신을 안겨주었습니다. “우리 엄마가 나를 너무도 사랑하시는구나” 자신의 몸조차 가누기 어려운 순간에 아들을 업고 뛰시며, 소리칠 수 있었던 그 힘의 근원은 어디서 나온 힘일까? 생각해 보면 신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 인생의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지금에서야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힘’이었음을 말입니다. 사랑의 힘은 위대합니다. 불가능함을 가능으로 바꾸는 동력입니다. 나사로를 사랑하신 예수님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건져 올리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사랑이 그 원천입니다. 보리떡 다섯 조각과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에서 시작된 만찬은 5천명 이상을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채울 정도로 남는 결과를 이루었습니다. 길에서 혹 기진할까 염려하신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이 만든 기적이었습니다. 사랑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만듭니다. 사랑의 힘은 자원과 형편에 결코 제한 받지 않는 역사를 만듭니다. 어떤 이론을 동원해도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결과를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기적’이라는 결론을 짓게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으로 시작한 일은 기적으로 마무리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타락한 인간을 거룩한 의인으로 바꾸십니다. 검디 검은 석탄이 하얗고도 하얀 눈이 될 수 없듯, 죄성으로 가득 찬 인간이 의인으로 결코 바뀌어질 수 없는데… 마지막 숙명의 장소인 지옥에서 기쁨과 행복의 장소인 천국으로 그 위치를 바꿀 수 있는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운명을 영벌에서 영생으로 바꾼 것입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기적입니다. 사랑의 힘을 믿습니다. 사랑으로 시작한 일은 기적으로 종결됨을 믿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가치를 다시금 확신하게 됩니다. 살면서 사랑으로 살아가도록 합시다. 안되는 일도 기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기적이 됩니다. 예배, 교제, 섬김, 전도등 신앙의 모든 행위들의 밑바닥에 ‘사랑’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신앙의 결과는 기적 그 자체가 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우리에게 언제나 사랑의 마음을 주옵소서”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09 “자기부인” 첨부 파일
Global
471 2017-02-24
“자기부인” ‘거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부흥 운동가였던 요한 웨슬레가 1741년7월25일 영국 의 옥스포드 대학 교수 및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하면서 사용된 설교제목이었습니다. 재미있는 표현 입니다. 영어로 ‘The Almost Christian’입니다. ‘온전 한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대체로 ‘그리스도인에 근 접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그림이 그려 지는지요? ‘거의’라는 말은 ‘대체로’ ‘거반’이라는 뜻을 포함한 말입니다. 퍼센테이지로 치자면 100%는 아 니지만 근접한 90-99% 정도? 그렇다면 ‘거의 그리 스도인’은 정말 ‘그리스도인’일까요? “그리스도인 같 지 않은 그리스도인도 많은데 ‘거의 그리스도인’이라면 괜찮은 거 아닙니까?” 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 니다. 그렇다면 만약 ‘빵’을 사려고 하는데 ‘거의 빵’이라고 하는 이름의 빵이 있다면 그것을 사 드실 용의는 있으신지요? 깊이 생각하도록 만드는 표현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누가 드러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예수님’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 인가를 살펴보면 됩니다. 예수님은 신앙인의 선명한 기준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지독하게 싫어하셨습니다. 아픈 사람을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신 후 자신의 인기가 상승하면 자신을 숨기려 하셨습 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능력을 흠모해 임금으로 추대하려 하는 군중들을 피해 다니셨습니다. 인기를 구하 고, 자기 PR이 대세인 오늘날의 흐름과는 정 딴판의 행보를 이루셨습니다. 왜 그리하셨을까요? 드러냄의 대상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드러내길 원하셨던 대상은 오직 하나님 뿐이셨습니다. 예수님의 평가에 따르면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는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인 물됨을 이리 높이 평가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성경을 묵상해 보면 그 해답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넓히기 위해 태어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역 이전, 오실 메시야를 세상에 소개하기 위한 사명을 안고 태어난 자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오직 드러내야 할 유일한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심에 대한 강력한 표현입니다. 세례 요한의 이 고백을 통해 그의 삶의 원칙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가 그리스 도인의 평생 슬로건입니다. 이런 삶의 방식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부인’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역설하셨습니다. 자기 부인이 필요한 이유는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입니다. 사람은 자기중심적 성향이 본성이 되기에 의지적으로 자기부인을 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초점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델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체중 감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그림을 보면 마른 사람이 아니라 통통한 사람이 미녀였습니다. 유사 이래 항상 통통하고 후덕하게 생긴 사람을 미인으로 여겼 는데, 모델이라는 직업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부터 마른 사람이 미인으로 그 관점이 바뀌었습니다. 후덕한 사람이 옷을 입으면 옷은 안 보이고 사람이 보이지만 대체로 마른 사람이 옷을 입으면 옷이 두드러진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마른 사람이 입어야만 디자이너의 옷이 100% 이상 살아난다는 한가지 이유에서 모델에 대한 선호가 마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직업적인 모델들이 디자이너의 옷을 잘 보여 주기 위해서 감량하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자신을 감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감량은 ‘자기부인’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나 보이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부인해야만 합니다. 내가 나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만 드러내는 통로가 될 때 신앙생활이 행복해 집니다. 신앙은 역설입니다. 그 중 하나가 자신을 부인하는 일입니다. 인생사 나를 드러내는 재미를 제외하면 삶 자체가 재미없을 것 같은데, 놀랍게 도 그 재미를 포기하면 신앙은 진짜 재미있어집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신앙의 진수는 자기부인으로 시작되 기 때문입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08 “성경 앞으로” 첨부 파일
Global
388 2017-02-17
“성경 앞으로”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역설했습니다.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는 “지식과 정보를 가진 자가 힘을 얻는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말은 역사를 통해서 어느 정도 증명이 되었습니다. 근대화, 현대화 과정에서 지식과 정보를 독점한 사람 또는 단체가 권력을 잡은 예가 많습니다. 독재자가 그 권력을 연장시키는 방법 중 하나가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한 통제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방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식과 정보를 접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 온 것이 아닐까요? 인터넷은 가히 지식과 정보를 품은 무한대의 바다라 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는 인터넷의 모든 정보 검색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컴퓨터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컴퓨터의 발전은 스마트폰으로 이어집니다. 스마트폰은 손안의 컴퓨터가 되어 필요한 정보검색을 더 쉽고 편리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인터넷과 컴퓨터가 연결되며 인공지능까지 탄생합니다. 앞으로 인류가 축적해 놓은 엄청난 지식과 정보는 인공지능이 장착된 스마트폰 속으로 속속들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컴퓨터, 인터넷, 인공지능으로 이어지는 IT의 눈부신 발전으로 힘의 근원이라 하는 지식과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특정인 또는 특정 단체에 의해 독점되었던 지식과 정보는 누구라도 차지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역사 이래로 이렇게 지식과 정보를 이렇게 쉽게 접할 수 있던 시대가 오늘날 말고 있었을까요? 힘의 끝은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은 창조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된 모든 것은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았을 정도니 얼마나 그 아름다움이 어떠했을까는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식과 정보의 힘은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을까요? 분명 지식과 정보는 힘인 듯 느껴짐에도 아름다움을 이룬다고 선뜻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지식과 정보가 지배하는 현실은 오히려 혼돈과 불확실만이 더욱 가중되고 있음을 어느 누구나 피부로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요? 알아야 할 영역을 지식과 정보만으로 한정시켰기에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요? 여기서 ‘지혜’에 대한 깊은 접근이 필요함을 강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역사를 잘 살펴보면 인류의 발전은 지식과 정보만이 아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한 힘을 통제했던 더 큰 힘이 존재했었습니다. 그 힘이 바로 ‘지혜’입니다. 애굽과 바벨론은 축적된 지식과 정보의 산실이었습니다. 그 지식과 정보로 세상을 통치한다고 여겨졌던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지혜로 애굽의 모든 힘을 통제했습니다. 다니엘도 지혜로 바벨론의 힘을 통제했습니다. 지혜는 지식과 정보에 대해 우위를 점합니다. 지식과 정보의 힘만으로는 안됩니다. 지식과 정보만으로는 힘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아는 것이 많다고 똑똑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아는 것 많고, 정보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 미련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 참 많습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대화를 나눠보면 쉽게 구별됩니다. 진정한 힘은 지혜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지식과 정보는 편안한 삶을 이루도록 만들어줄지는 몰라도, 평안한 삶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힘은 평안을 누리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평안은 지혜로운 자의 몫 입니다. “지혜를 찾는 사람은 복이 있고, 명철을 얻는 사람은 복이 있다. 참으로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황금을 얻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 지혜는 진주보다 더 값지고, 네가 갖고 싶어하는 그 어떤 것도 이것과 비교할 수 없다 (잠언 3:13-15)” 성경은 지혜의 가치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담았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습득할 수 있는 지름길은 성경을 펼치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지식과 정보가 힘을 가져다 준다고 믿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은 성경에서 눈을 떼지 않습니다. 지식과 정보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지혜를 습득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은 지식과 정보로 승부를 보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혜’로 정면승부 합시다. 성경을 펼칩시다. 지혜가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07 “열매 맺기” 첨부 파일
Global
371 2017-02-10
“열매 맺기” 사람은 성공을 추구합니다. 성공의 키워드는 ‘큰 것’입니다. ‘크다’라는 의미를 가진 ‘대형’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가면 성공을 이룬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대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것’에 열광합니다. 대기업, 대형 쇼핑몰, 대규모 식당, 대형 건물… 심지어 교회도 대형교회를 성공한 교회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크다고 다 성공한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100년 전 성공기업으로 칭송 받았던 성공 기업의 92%는 현재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100년 전 대형교회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교회는 5% 이하라고 합니다. 진정 성공했다면 그 존재감은 결코 사라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며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명선언문입니다. 예수님은 평생 동안 살았던 지역이 반경 30마일 이내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가르치고, 치유하고, 설교하는데 온 생애를 바치셨습니다. 일생을 30마일 이내에 사셨고,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12명의 제자들과 씨름하시다가, 그 중 한 제자의 배반으로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나마 죽임을 당한 후 그 열두명의 제자들마저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예수님 당시 큰 영향을 행사했던 지도자들이 수두룩했고, 외형적 존재감을 과시했던 종교인들이 넘쳐났던 것을 감안한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초라하기 그지 없는 사역이 분명합니다. 만약 외형적으로 ‘큰 것’이 성공의 기준이라면 예수님은 분명 실패자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시간이 지날수록 전 세계에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가르침을 인생의 지표로 삼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실패자가 아닌 진정한 성공자임을 부인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대하면서, 성공은 ‘얼마나 넓은 지역에서, 얼마나 큰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에 달린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공은 열매가 기준입니다. 성경은 열매에 대해서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은 열매로 평가되어야 한다(마태복음 7:16)”는 지침까지 제시하셨습니다. 열매는 외형을 의미지는 않습니다. 열매는 품질을 뜻합니다. 저희 집 정원에 오렌지 나무가 있습니다. 이 오렌지 나무가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보통 오렌지의 대여섯배는 족히 될 수 있는 크기의 오렌지를 생산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초대형 오렌지의 맛은 정말 별로였습니다. “맛 좀 보세요”라고 자신 있게 내놓기가 쑥스러울 정도의 밋밋한 맛의 오렌지입니다. 그래서 한 점 맛본 후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좋은 열매를 말씀하셨다면 크기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좋은 맛을 뜻하시고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열매는 외관의 화려함이나, 크기를 뜻함이 아닙니다. 열매는 내면을 말합니다. 성경은 성공을 혐오하지 않습니다. 성공의 가치를 애써 깎아 내리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공을 위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단지 외적 규모에 치중한 성공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만약 성공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면 ‘열매’를 언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열매는 성공입니다. 과실 나무가 잘 자라서, 뿌리에서 흡수한 물과 풍부한 영양소를 가지에 공급하지 않았다면 결코 맺을 수 없는 것이 열매입니다. 그렇기에 열매는 성공의 결실입니다. 그러나 성공을 외형에서만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실수하는 것입니다. 과실 나무의 존재감은 열매에 있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설사 맺었다 할지라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했다면 그 과실 나무는 존재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매 맺지 않은 나무는 베어 땔감으로 사용할 뿐이다라는 극단적 표현까지 사용하신 것입니다. 성공의 기준은 ‘열매’입니다. 열매도 맺지 않은 상태에서 ‘성공여부’를 운운할 수는 없습니다. 좋은 것, 부족한 것을 평가할 수도 없습니다. 신앙은 열매 맺기를 목표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열매 없는 열정, 열매 없는 헌신, 열매 없는 성경공부는 다 무익할 뿐입니다. 열매는 외형에서 그 가치를 찾아서도 안됩니다. 열매의 핵심은 내면입니다. ‘내면이 아름다운 삶’을 이루어야 됩니다. 그 내면의 가치가 드러날 때까지 믿음의 경주를 쉬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06 “왜 기도인가?” 첨부 파일
Global
479 2017-02-03
“왜 기도인가?” 남보다 수면시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잠이 부족한 듯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불면증 환자도 아닌데도 연신 하품이 나며, 수면부족에서 나타나는 두통과 근육통, 그리고 무기력증이 그 증상입니다. 이런 증상의 원인 중 하나가 수면 시 무호흡이라고 합니다. 잠자는 동안에는 숨쉬는 통로인 기도가 좁아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숨을 쉬려 하기에 코골이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코를 골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며 숨을 쉬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꺼번에 숨을 몰아 쉽니다. 이것이 수면 중 무호흡증입니다. 수면 중 무호흡증은 만성피로에 시달리게 만드는 주범 중 하나라는 것이 현대의학의 설명입니다. 그러려니 하고 무심하게 방치하노라면 심근경색이나 뇌졸증 같은 심각한 결과를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수면 시 숨을 쉬지 못하는 무호흡에 대한 내용을 접하면서 ‘기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도에 대한 표현 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표현은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라는 말입니다. 수많은 설교와 책을 통해서 접해 온 말입니다. 호흡은 생명 유지의 기초입니다. “숨을 쉬어야지”라고 생각하든,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든 호흡은 이뤄져야 합니다. 만약 호흡하는 일에 문제가 생기면 생명은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됩니다. 입원한 환자의 이미지 1호는 산소 마스크를 쓴 모습입니다. 호흡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돕는 생명 유지 장치 중 가장 중요한 장치가 산소 마스크가 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제일 힘들어 하는 것은 호흡입니다. 그래서 산소 마스크를 씌웁니다. 그러나 임종 직후 그 산소 마스크가 제일 먼저 벗겨집니다. 호흡이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호흡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제1의 증거입니다. 결국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라고 표현한 것은 영적 건강의 지표가 기도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표현된 말이 분명합니다. 살아있는 인간이 호흡하지 않는다면 난센스라 말할 것입니다. 육체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호흡은 필수임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도 이상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고 무심히 다룹니다. 한 기독교 기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전체 그리스도인들의10% 정도 밖에 안된다라는 통계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가히 충격적입니다. 사람이 무호흡으로는 단 몇 분도 지탱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건만, 영혼의 호흡인 기도 없이 과연 신앙생활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의했다면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7)”고 명령합니다. 기도의 중요성을 잊지 말라는 완곡한 표현입니다. 영적 무호흡을 결코 방치해서는 안된다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기도는 영적 생명을 유지시키는 기본이요, 가장 중요한 영성적 행위임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2월부터 매월 기도카드를 발행합니다. 영혼의 호흡인 기도생활을 구체적으로 돕기 위한 취지에서 시작된 새로운 사역입니다. 주보에 첨부된 기도카드를 가지고 하루에 3분 이상 기도합시다.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라는 것 때문에 고민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기도카드에 제시된 기도제목이 기도를 도울 것입니다. 기도하다 보면 영혼이 활력을 얻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혹 기도 없는 신앙생활인지 조차 인식하지 못하였다면, 이 기도카드를 활용하여 기도의 자리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분명 영적인 건강이 찾아오고 있음을 강하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05 “바른 해석, 바른 이해” 첨부 파일
Global
464 2017-01-27
“바른 해석, 바른 이해” 2차 세계대전 말엽의 사건입니다. 1945년 7월26일 미국 대통령 트루먼, 영국 총리 처칠, 중화민국 주석 장제스 등 연합국 수뇌들은 포츠담선언을 통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냅니다. 연합국 측의 항복 요구가 언론에 대서특필 되면서 일본 여론은 들끓었습니다. 정부의 자세를 밝히라는 요구는 점차 거세 졌고, 결국 당시 스즈키 칸타로 총리는 7월28일 오후 4시 기자회견을 갖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말실수를 하고 맙니다. "우리는 (포츠담선언)에 대해 '모쿠사츠' 할 따름입니다"라면서 '모쿠사츠'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모쿠사츠((もくさつ, mokusatsu)'라는 말은 영어나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서구 언어로 그 뜻을 표현할 수 있는 적당한 단어가 없습니다. 일본어 '모쿠사츠'는 '논평을 유보하다'에서부터 심지어 '거부하다'라는 의미까지 있습니다. 스즈키 총리는 '논평을 유보하다'는 뜻으로 '모쿠사츠'라는 용어를 쓴 것이었지만, 일본의 대외 선전 매체의 역할을 하던 도메이 통신이 영문기사에서 '모쿠사츠'를 '무시하다 (ignore)’로 옮기고 만 것입니다. 도메이 통신의 '무시하다'라는 표현은 연쇄반응을 일으켜 서방 언론에 '거부하다'라는 의미로 그 뜻이 바뀌고 맙니다. 이에 격분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사흘 뒤인 8월3일 원자폭탄 투하를 지시하는 문서에 서명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연합통신에서 기자생활을 하신 서옥식님은 ‘오역의 제국’이란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미국은 '무조건 항복' 요구를 거부한다는 답변에 경악했고 결국 8월6일 히로시마에 이어 8월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영어를 잘못 알아 듣는 바람에 총을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에 유학 중인 일본 학생이 늦잠을 자다가 학교에 지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워낙 급한 마음에 남의 집을 가로질러 학교를 가게 됩니다. 마침 이 지역을 순찰 중인 경관이 수상한 동양인의 행동을 보고 반복해서 경고했습니다. “Freeze! Freeze! (정지!)” 하지만 마음이 급한 일본 학생은 이를 “Please”로 잘못 알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경찰을 한번 쳐다보고는 길을 재촉했습니다. 결국 경관은 이 학생을 향해 총을 발사하게 되고 일본인 유학생은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나중 법정에서 이 사건의 참고인으로 출석한 대부분의 일본 유학생들은 ‘Freeze’와 ‘Please’의 발음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으며, 영어의 ‘Freeze’ 에 ‘정지’라는 뜻이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처럼 잘못된 해석은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때론 불행한 결과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잘못 이해함으로 엉뚱한 결과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따라서 바른 해석과 바른 이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표본인 성경에 대한 접근도 ‘바른 해석’과 ‘바른 이해’를 전제로 삼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영적이라는 말입니다. 동시에 단어, 문장, 문법, 문맥(Context)으로 표현되는 ‘언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구조적, 논리적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석(주해)’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한 구절에 대해 어떤 해석을 내리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성경은 영적이기에 주석(성경 학자들의 연구에 의한 해설서)을 사용하는 것이 극히 인간적 방법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는 극히 무지하며 위험한 주장입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배경과 단어의 원어적 의미, 문법적 의미 및 문맥을 살펴보는 것은 필수입니다. 성경이 영적이라 해서 신비로운 기운에 의지한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시기에 성령의 깊은 통찰을 의지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성령의 통찰이 ‘신비로운 감정’만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지혜의 영이십니다. 동시에 진리의 영이십니다. 따라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통찰은 감정을 뛰어넘고, 이성과 논리마저 조금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혼돈의 시대가 되니 어지러운 성경해석이 난무합니다. 바른 성경해석도 잘못된 것처럼 조장시키는 가르침이 너무 많습니다. 신학과 교리를 지극히 인간적인 것으로 평가절하시키기도 합니다. 성경 해석의 방법을 잘 익힌 후 갖는 개인 경건의 시간에까지 도전을 합니다. 바르게 설명해도 집중하지 못함으로 성경의 뜻을 ‘오해’하는 일들이 다반사입니다. 이런 혼돈의 시대에 성경에 대한 바른 훈련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배우더라도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그렇기에 이 시대는 신학적 균형을 갖춘 복음적 목회자로부터 성경을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어설프게 배운 성경지식이 풍성한 신앙생활을 방해합니다. 동시에 성경을 접할 때 한눈 팔지 않고 성경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끈기도 필요합니다. 이 한해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 바른 이해가 이루어지는 축복을 경험합시다.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604 “5감을 뛰어 넘는 6감의 삶” 첨부 파일
Global
466 2017-01-20
“5감을 뛰어 넘는 6감의 삶” 사람들은 ‘5감을 중요시 여깁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Fact)에 대한 인식은 ‘5감’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5감’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말합니다. 이게 문제가 생기면 사람은 사실에 대한 인식 부족이 생기기에 혼돈을 겪습니다. 그래서 오감은 중요하게 여길 수 밖에 없습니다. 얼마 전 깡통을 따다가 손가락에 제법 깊은 상처를 입어서 일곱 바늘을 꿰매었습니다. 그리고 상처가 아물어 실밥도 풀었는데 고민이 생겼습니다. 아물었지만, 상처 난 손가락의 감각이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만져봐도 그 부위로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의사는 천천히 감각이 돌아올 것이라 말하지만,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괜히 걱정이 됩니다. 사람들은 인식의 통로라 하는 감각 기관이 마비될 때 무척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5감’ 위에 한가지 감각기관이 더 있습니다. ‘영감’이라는 감각기관입니다. 이 감각 기관이 마비되거나 죽으면 기를 써도 영적인 세계를 접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세계만을 접할 뿐입니다. 야곱은 집을 떠났습니다. 혼자였습니다. 밤을 맞게 됩니다. 밤을 피할 수 있는 집 한 채 보이지 않았으니 유숙을 하게 됩니다. 들녘 한 복판에서 대충 잠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누우면 보이는 것은 깜깜한 하늘 뿐입니다. 적막한 들녘이라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 나뭇잎 움직이는 소리, 간간이 들리는 동물 울음소리가 귀를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하늘은 촘촘한 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전 같으면 낭만적으로 여겨질 수 있었겠지만, 철저히 외톨이가 된 자의 유숙은 회한의 눈물만이 있을 뿐입니다. 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리 저리 뒤척이다 겨우 눈을 붙일 수 밖에 없는 상황, 이것이 야곱의 현실이었습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마음을 정돈해도 이내 ‘홀로 된 자신’을 자각하면 냉랭한 현실만이 보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야곱은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됩니다. 잠들기 전에 야곱이 유숙했던 그 자리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황량한 들녘이 분명했습니다. 홀로 덩그러니 자리잡은 고독의 장소가 분명했습니다. 이리 저리 뒤척거리며 어렵사리 잠든 야곱에게 드러난 유숙의 장소는180도 달랐다.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닥다리가 서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사닥다리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땅으로 내려와 그 명령을 수행하는 천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분명 오감으로 느낀 현실은 ‘자기 혼자’, 그리고 황량한 벌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5감’으로만 바라본 현실과 영감으로 바라본 현실은 달라도 한참 달랐습니다. 혼자인 줄 알았는데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곳은 야곱을 위한 꿈의 도시가 천사들에 의해서 건설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표현을 지나칠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Surely the Lord is in this place, and I was not aware of it)” 야곱은 자신이 이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영감’으로 하는 것입니다. 만약 영감이 마비되면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을 결코 인식할 수 없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5감’으로 보게 현실과 ‘5감’을 뛰어 넘어 영감으로 바라보는 현실은 충분히 다를 수 있음을. 보인다고 다 똑같이 보는 게 아닙니다. 감각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현실을 읽어내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탁월한 ‘5감’의 능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영감’까지 사용하는 ‘6감’의 소유자를 당해낼 수는 없습니다. 영적 세계는 영적인 감각으로만 접할 수 있습니다. ‘영적 신비’는 ‘영’으로 풀어야 합니다. 신앙은 ‘5감’을 뛰어넘는 ‘영감’으로 다뤄져야 합니다. 신앙인은 ‘영적 안목’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영감이 샤프해지면 숨겨진 ‘진짜 현실’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영감’이 예민해 지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영감’으로 현실을 봅시다. ‘영감’으로 미래를 봅시다. ‘영감’으로 ‘꿈’을 가꿉시다. ‘영감’으로 인생의 승부를 겁시다. ‘영감’을 상실하면 ‘최선’을 놓칩니다. ‘영감’을 놓치면 ‘기회’를 놓칩니다. “주여, 우리를 탁월한 ‘영감’의 소유자가 되게 하옵소서.”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