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5감을 뛰어 넘는 6감의 삶”
사람들은 ‘5감을 중요시 여깁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Fact)에 대한 인식은 ‘5감’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5감’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말합니다. 이게 문제가 생기면 사람은 사실에 대한 인식 부족이 생기기에 혼돈을 겪습니다. 그래서 오감은 중요하게 여길 수 밖에 없습니다.
얼마 전 깡통을 따다가 손가락에 제법 깊은 상처를 입어서 일곱 바늘을 꿰매었습니다. 그리고 상처가 아물어 실밥도 풀었는데 고민이 생겼습니다. 아물었지만, 상처 난 손가락의 감각이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만져봐도 그 부위로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의사는 천천히 감각이 돌아올 것이라 말하지만,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괜히 걱정이 됩니다. 사람들은 인식의 통로라 하는 감각 기관이 마비될 때 무척 걱정을 합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5감’ 위에 한가지 감각기관이 더 있습니다. ‘영감’이라는 감각기관입니다. 이 감각 기관이 마비되거나 죽으면 기를 써도 영적인 세계를 접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세계만을 접할 뿐입니다.
야곱은 집을 떠났습니다. 혼자였습니다. 밤을 맞게 됩니다. 밤을 피할 수 있는 집 한 채 보이지 않았으니 유숙을 하게 됩니다. 들녘 한 복판에서 대충 잠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누우면 보이는 것은 깜깜한 하늘 뿐입니다. 적막한 들녘이라 바람 소리, 풀벌레 소리, 나뭇잎 움직이는 소리, 간간이 들리는 동물 울음소리가 귀를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하늘은 촘촘한 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전 같으면 낭만적으로 여겨질 수 있었겠지만, 철저히 외톨이가 된 자의 유숙은 회한의 눈물만이 있을 뿐입니다. 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리 저리 뒤척이다 겨우 눈을 붙일 수 밖에 없는 상황, 이것이 야곱의 현실이었습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으로 마음을 정돈해도 이내 ‘홀로 된 자신’을 자각하면 냉랭한 현실만이 보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야곱은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됩니다.
잠들기 전에 야곱이 유숙했던 그 자리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황량한 들녘이 분명했습니다. 홀로 덩그러니 자리잡은 고독의 장소가 분명했습니다. 이리 저리 뒤척거리며 어렵사리 잠든 야곱에게 드러난 유숙의 장소는180도 달랐다.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닥다리가 서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사닥다리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땅으로 내려와 그 명령을 수행하는 천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분명 오감으로 느낀 현실은 ‘자기 혼자’, 그리고 황량한 벌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5감’으로만 바라본 현실과 영감으로 바라본 현실은 달라도 한참 달랐습니다. 혼자인 줄 알았는데 결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곳은 야곱을 위한 꿈의 도시가 천사들에 의해서 건설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표현을 지나칠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Surely the Lord is in this place, and I was not aware of it)” 야곱은 자신이 이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영감’으로 하는 것입니다. 만약 영감이 마비되면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을 결코 인식할 수 없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5감’으로 보게 현실과 ‘5감’을 뛰어 넘어 영감으로 바라보는 현실은 충분히 다를 수 있음을. 보인다고 다 똑같이 보는 게 아닙니다. 감각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현실을 읽어내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탁월한 ‘5감’의 능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영감’까지 사용하는 ‘6감’의 소유자를 당해낼 수는 없습니다. 영적 세계는 영적인 감각으로만 접할 수 있습니다. ‘영적 신비’는 ‘영’으로 풀어야 합니다. 신앙은 ‘5감’을 뛰어넘는 ‘영감’으로 다뤄져야 합니다. 신앙인은 ‘영적 안목’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영감이 샤프해지면 숨겨진 ‘진짜 현실’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영감’이 예민해 지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영감’으로 현실을 봅시다. ‘영감’으로 미래를 봅시다. ‘영감’으로 ‘꿈’을 가꿉시다. ‘영감’으로 인생의 승부를 겁시다. ‘영감’을 상실하면 ‘최선’을 놓칩니다. ‘영감’을 놓치면 ‘기회’를 놓칩니다. “주여, 우리를 탁월한 ‘영감’의 소유자가 되게 하옵소서.”
목회실에서 김지성 목사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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